변호사 김백영
Ⅰ. 마음에 씨앗
마음에 씨앗을 심어두면 시절인연이 도래해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필자는 오래전에 미국에 있는 월든호수와 로스코채플을 방문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는데, 바야흐로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이곳을 방문하는 결실을 맺고 이를 공유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Ⅱ. 월든호수
1. 소로우
필자는 오래전에 승려 법정(속명 박재철, 1932-2010)이 쓴 글을 읽다가 헨리데이비드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와 그의 저작 월든(Walden)뿐만 아니라 그가 일시 머물렀던 월든(Walden)호수도 알게 되었다.1)
소로우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에서 1817년에 출생하여 16세에 하바드대학에 입학하고 1937년 20세에 졸업한 엘리트였으나 부와 명성을 쫓는 삶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소로우는 고향 콩코드로 돌아와서 교사로 취직하였으나 학생들에 대한 체벌지시를 거부하고 사직을 한 후 아버지의 연필공장에서 일하면서 글쓰기와 틈틈이 주변의 자연을 관찰하다가 28세가 되던 1845년 3월말에 월든호수가에 손수 통나무 오두막을 짓고 이곳에서 30세이던 1847년 9월까지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때 숲속에서의 생활경험을 토대로 하여 37세가 되던 1854년 월든(Walden)이란 저작물을 출간하였다.2)
월든 중에서 그의 삶을 대표하는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3)
소로우는 노예제도4)와 멕시코전쟁5)에 반대하고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정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하여 1846년 구속되기도 하였다.6)
소로우는 이 경험을 토대로 1849년 「미학」 잡지에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소로우 사후에 시민불복종으로 개칭)이란 글을 남겼다.7)
그 중 대표적인 구절을 옮겨본다.8)
권력이 일단 국민의 손에 들어왔을 때 다수의 지배가 허용이 되고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는 실제적인 이유는 그들이 옳을 가능성이 가장 크거나 그것이 소수자들에게 가장 공정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가장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건건 다수가 지배하고 있는 정부는 정의(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정의일지라도)에 입각한 정부라고 할 수는 없다. 옳고 그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양심인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그 안에서 다수는 오직 편의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 문제들만 결정하는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시민이 한 순간만이라도, 혹은 아주 적은 정도라도 자신의 양심을 입법자에게 맡겨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나는 이것만 알고 있다. 즉, 이 매사추세츠 주 안에서 천 사람이. 아니 백 사람이. 아니 내가 이름을 댈 수 있는 열 사람(열 사람의 정직한 사람)이. 아니 단 한명의 정직한 사람이라도 노예 소유하기를 그만두고 실지로 노예제도의 방조자의 입장에서 물러나며 그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만약 올해 1천명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세금을 내서 주 정부로 하여금 폭력을 휘두르고 선량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만큼이나 폭력적이고 유혈적인 처사는 아닐 것이다. 만일 평화적인 혁명이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평화적인 혁명일 것이다. 만약 세금 징수원이나 그 밖의 공무원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나에게 묻는다면(실제로 그렇게 물은 사람이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한다면 당신 직책을 내놓으시오”라고. 국민이 충성을 거부하고 공무원이 자기 자리를 내놓을 때 혁명은 완수되는 것이다.
소로우는 명상과 글쓰기, 농사짓기, 틈틈이 시민들과 소통하는 강연을 계속하다가 1862. 5. 6. 폐결핵으로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로우는 자신의 생각을 「저널」이란 형식으로 수십 권을 기록해왔는데 그 중 일부를 옮겨본다.9)
지금 나는 꼬불꼬불하고 메마른,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길을 그리워한다. 그 길은 마을 먼 곳으로 나를 이끈다.
나를 지구 밖 우주로 인도하는 길. 그러나 유혹하지 않는 길. 여행지의 이름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길. 농부가 자신의 농작물을 짓밟는다고 불평하지 않는 길. 어느 신사가 최근에 지은 자신의 시골별장을 무단으로 침입하였다고 불만을 털어놓지 않는 길. 마을에 작별인사를 하고 걸음을 재촉하여도 좋은 길. 순례자처럼 정처없이 떠나는 여행의 길. 여행자와 자주 부딪치기 어려운 길. 영혼이 자유로운 길. 벽과 울타리가 허물어져 있는 길. 발이 땅을 딛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머리가 하늘로 향해 열려 있는 길. 다른 여행자를 만나기 전에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나눌 준비를 할 만큼 넓은 길. 사람들이 탐을 내서 서둘러 이주할 정도로 토양이 비옥하지 않은 길. 보살필 필요가 없는 나무뿌리와 그루터기 울타리들이 있는 길. 여행자가 그저 몸 가는 대로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길. 어디로 향하여 가든 오든, 아침이든 저녁이든, 정오든 자정이든 별다른 차이가 없는 길. 뭇 사람의 땅이 생각에 몰두할 수 있는 길. 숨이 차면 천천히 왔다 갔다 하는 변덕마저도 소중한 길. 사람들과 만나 억지로 저녁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거짓관계를 맺지 않아도 좋은 길.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갈 수 있는 길.
또한 소로우의 영적의 삶을 보여주는 소로우가 1848. 3. 27. 시인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0)
나는 단순함의 가치를 믿습니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하루 종일 신경 써야만 하는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또 그가 무시해 버리는 일들은 종종 얼마나 중요한 것들인가요. 수학자가 어려운 문제를 풀 때는 우선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고 문제를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 듯이 삶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들을 단순화시키고,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꼭 필요한 것과 진정한 것들을 구분해 내야만 합니다. 당신이 어디에다 삶의 근본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땅속을 잘 살피십시오. 나는 거짓이 아니라 진실 위에 서 있겠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걸까요?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인가요?
나는 웬만해서는 잘 속지 않는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것은 믿지 않고, 돈이 얼마가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것을 어디에 투자할지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신중하고 영리한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들은 마치 은행원처럼 삶의 대부분을 책상 앞에 앉아서 보냅니다. 그렇게 열정이라고는 거의 없이 지내다가 점점 녹이 슬고 결국 사라져 버립니다. 무엇인가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빛나는 태양 아래서 과연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할까요? 그들은 빵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요? 그들은 삶이 무엇인지 아는 걸까요? 만일 그들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지금 당장 자신들에게 익숙한 그 장소를 떠날 것입니다. 상식을 갖춘 사람들이 속해 있고, 우리의 사회제도가 뿌리내리고 있는 이 소중한 일상의 삶이란 사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초없이 세운 상상의 건축물처럼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 이따금씩 새벽을 밝혀주는 저 희미한 진실의 빛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견고하고 영원한 어떤 것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은 사실 그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축하한 일은 없으나 내가 가진 신념과 영감을 존중합니다. 사람의 위치라는 것은 사실 너무 단순해서 장황하게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어떤 맹세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회나 자연이나 신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일 뿐이고, 또 그렇게 되고자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삽니다. 과거는 기억일 뿐이고 미래는 기대에 불과합니다. 나는 살아 있음을 사랑합니다.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변화와 새로움을 더 좋아합니다. 나쁜 것이 어떻게 나아졌는가에 대한 기록은 아직 없습니다. 나는 다만 어떤 것을 믿을 뿐이며,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믿는 올바른 삶을 추구하고, 그것에 다가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십시오. 마치 개가 자신의 주인을 따르듯,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십시오. 자신이 원하는 뼈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아내십시오. 그것을 파고들고, 묻어두었다가 다시 파내고, 또다시 파고드십시오. 너무 도덕적이 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자신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 도덕적인 것 이상의 목표를 가지십시오. 그저 좋은 사람이 되지는 마십시오. 무언가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십시오. 모든 우화에는 교훈이 들어있지만, 순진한 이들은 이야기 자체만 즐길 뿐입니다. 당신과 빛 사이를 그 무엇도 가로막게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형제로서만 존중하십시오. 천상의 도시를 방문할 때는 누구의 소개 편지도 필요 없습니다. 문을 두드리며 곧장 신을 만나기를 청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당신 곁에 동행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이 세상에 홀로임을 기억하십시오.
2. 법정
승려법정의 본명은 박재철이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서 전남대학교 상학과를 다니다가 6. 25. 민족상잔을 목도하고 부조리한 사회와 가치혼돈시대에 삶과 죽음에 대하여 고뇌하다가11) 1954년 오대산으로 향하다가 폭설로 되돌아와서 당시 서울 선학원에 계시던 대선지식이던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초대종정 역임)을12) 친견하고 그 자리에서 은사로 모시고 삭발하고 득도(得度)하였다.13)
법정은 효봉의 일대기를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란 단행본으로 남겼다.
법정의 이력을 보면 1954년 통영미래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한 이래14) 1958년 해인사 강원대교과를 마치고 동국역경원에서 당대대강백 운허스님(耘虛, 1892-1980)을 도와 경전번역 등에 종사하였고 총림선방에서 장기간 참선수행에 진력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법정은 1976년 쓴 글에서 자신의 출가에 대하여 “부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묻는다 할지라도 나는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것이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 내식대로 살기 위해서 집을 떠났노라고 세상이 무상해서라거나 불교의 진리에 매혹되어서라거나 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라고는 말할 수 없다(1976).”라고 밝힌바 있다.15)
법정은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으나16) 투쟁과정에서 생기는 분노심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보아 자신의 본분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어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佛日菴)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아마 함석헌과 교류하면서 소개받은 간디의 사상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17)
법정은 불일암에서 홀로 살면서 수행력으로 터득한 체험과 독서를 통하여 얻은 깨우침을 샘터잡지매체를 통한 짧은 글을 쓰거나 단행본을 묶어내고 시민을 상대로 한 법문을 통하여 일반대중과 소통하였다.
법정은 유명세를 타자 허상을 쫓아 불일암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하여 1992년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오지의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겨 자신을 경계하였다.18) 그 후 법정은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자 7년간 화전민생활을 정리하고 동해안 바닷가로 거처를 옮겼다.
2010. 3. 11. 열반에 들기에 앞서 장래를 조촐히 하고 자신이 그동안 낸 책들의 절판을 하도록 유언하였다.19)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남기는 말20)
1.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21)
2.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 논 말 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22)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23)
2010. 2. 24. 법정(속명 박재철)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 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 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24)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 주기 바란다.25)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26)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27)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28)
우리나라의 고승이 돌아가면 엄청난 비용을 들여 호화 장례를 치르고 부도탑을 세우는 것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고 간소화 장례와 사리신앙에 대한 경계를 몸소 보여주었다.29)
법정의 정신적 토대는 불교의 가르침이나 그의 삶과 죽음에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간디, 소로우, 스코트 니어링으로 보여진다.
법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법정의 어록에서 이에 관한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간디에 관하여는 법정의 대명사인 “무소유”란 글에서 마하트라 간디의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는 평판 이것 뿐이오”를 인용하고 있다.30)
물론 출가승려의 재산은 율장에 발우(밥그릇), 물병, 3벌의 옷이지만 이를 지키는 승려는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인간에서 이를 발견하면 용기도 얻지만 스스로를 뒤돌아보면 부끄러움을 느낀다.31)
또 간디가 살았던 오두막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출신 신학자 겸 철학자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가 남긴 “내게는 그 집의 단순성과 아름다움과 청결함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간디의 오두막은 모든 사람과의 사랑과 평등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다”를 인용하고 있다.32)
소로우에 관한 언급을 보면 1993년도에 쓴 “당신은 조연인가 주연인가”에서33) <월든>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바 강승영의 월든 번역본이 출간된 해가 1993년이고 “생명을 가꾸는 농사”에서34) 강승영 번역본의 월든을 언급하면서 “몇 해 전 보스톤에 들렀을 때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에 있는 월든호숫가의 그 오두막을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고 하고 있고, 2005. 10. 20. 청도 운무사 초정법회에서 소로우에 관한 질문을 받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를 제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일찍부터 좋아했습니다. 처음에는 소로우의 <월든>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참 좋았습니다. 제가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면 마하트마 간디와 소로우의 간소한 삶일 것입니다. 간소하게 사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삶입니다. 복잡한 것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단순하고 간소해야 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35)
법정스님의 책 표지 그림은 스스로 나는 심플하다고 하면서 삶과 그림을 일체화시킨 화가 장욱진의 그림으로 디자인되어 있다.36)
법정은 1998. 6. 27. 교보문고 초청강연에서 <월든>을 소개하면서 월든호수를 다녀왔다고 밝히고 있고37) 또 2001. 11. 4. 뉴욕불광사 초청법회에서 월든호수를 다녀왔다고 하면서 관심있는 분의 방문을 추천하고 있고,38) 2008년 발간된 <아름다운 마무리> 월든호수방문을 언급하고 있고, 재차 방문하였다고 하면서 “한해에 60만명의 정신적 순례자(관광객이 아님)들이 세계각처에서 이 월든을 찾는 것을 보아도 그 넓이와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찬양하고 있다.39)
마지막으로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8.6. – 1983.8.24.)의 유언을 소개하고 있다.40)
마지막 죽을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장례업체나 그 밖의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된다.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데 관여해서는 안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서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소나무 상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누이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도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5번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설교나 설교사나 목사, 그 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바다가 바라보이는 우리 땅 나무 아래 뿌려 주기 바란다.
나는 이 맑은 의식으로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법정은 1989. 11월부터 3개월간 인도를 여행하고 <인도기행(1991 샘터)>이란 책자를 남겼다.
법정은 인도의 장례문화를 직접 보았다. 인도의 장례문화는 시신을 관에 넣지 않고 들 것에 그대로 놓고 화장지로 옮겨서 화장을 한다.
법정은 1977년 쓴 글에서 “불교의 수행승들은 마지막 남은 그 증거를 없애는데 비정하리만큼 철저하다. 화장을 하여 남은 유골마저 갈아서 흩어버린다. 살아서도 소홀히 하던 육신을 죽고 나서까지 홀대한다. 본래무일물임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것이라”라고 밝혔다.41)
부처님이 그리하였고 스코트 니어링이 하였듯이 자신의 시신도 평상복을 입혀 들 것에 놓고 화장(다비)을 하도록 하였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고승의 장례가 여법하다. 과연 법정이 뱉은 말 그대로 실행이다.
3. 월든 호수와 소로우 오두막
필자는 2017. 11. 17.부터 2017. 11. 27. 미국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필라델피아의 필라델피아 미술관, 로댕미술관, 보스톤의 보스톤미술관, 월든호수 등을 방문하게 되었다.
월든호수는 11월 25일 방문하고 월든호수를 한바퀴 돌고(사진 1), 소로우가 살았던 통나무 오두막을 찾아가서 내부를 살펴보았다.(사진 2)
월든을 읽고 상상하였던 것과 직접 현장을 보니 감격스러웠다. 오늘날 소로우의 월든호수에서의 삶은 케이블 방송의 자연인의 삶과는 다른 차원의 삶이다. 소로우의 월든 삶을 계승한 사람으로 미국의 스코트니어링과 그의 처 헬렌 니어링을 들 수가 있다. 이 두 부부는 1954년 월든 출간 100주년에 “조화로운삶”을 출간하였고42) 몸소 농사와 자급자족의 간소한 삶을 실천하였다.
스코트 니어링은 “실제 삶의 방식을 사회경제적인 비판의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월든과 조화로운 삶의 근본문제는 사람의 자유였다”고 밝히고 있다.43)
Ⅲ. 로스코채플
1. 그림과 눈물
「적과 흑」의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은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 갔다가 14세기 화가 지오토(giotto)가 그곳에 그려 놓은 프레스코화를 보고 그만 압도되고 만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져 의식을 잃고서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충격에서 벗어나는데 무려 한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탈리아 심리학자 그라지넬라 마제리니가 자신의 책 「스탕달 신드롬」에서 이런 현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명명했다. 스탕달은 일기에서 “아름다움의 절정에 빠져있다가 … 나는 천상의 희열을 맛보는 경지에 도달했다. 모든 것이 살아 일어나듯이 내 영혼에 말을 건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명화를 보고 가슴 뛰는 느낌을 경험하였으나 스탕달신드롬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오래전에 제임스 엘킨스가 쓴 「그림과 눈물」이란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관람객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린 사례에 관한 기록이다. 특히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시에 있는 로스코채플(예배당)의 사방벽에 걸려있는 로스코의 벽면화에 관한 언급이었다.44) 로스코채플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벽면화를 보고 울다가 떠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관람객의 70%가 운다는 보고도 있다.45)
2. 마크 로스코
(1) 마크 로스코에 관한 소개
로스코작품을 보기 전에 먼저 로스코의 간이연보를 소개한다.46)
- 1903년 마크 로스코(Mark Rothsko)는 러시아 유대인 가정에서 4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고 본명은 마르쿠스 로트코비치였다.47)
- 1910년 로스코의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트로 먼저 이주한다. 로스코 역시 미국으로 나머지 가족과 함께 이주를 하였다. 1914년 로스코의 아버지는 결장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 1921년 로스코는 1921년에서 1923년 사이에 예일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하고 심리학 등을 배웠으나 미술은 수학하지 않았다.
- 1924년 장학금이 취소되자 예일대를 중퇴하고 포틀랜트로 돌아가 극단에서 연극을 공부하면서 “내가 최초로 색채와 구성의 세계와 만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극단이었다”고 회상한바 있다.
- 1925년 로스코는 뉴욕시의 아트스튜던츠리그(ASL)에서 맥스웨버(Max Weber)의 회화수업을 들었고 1933년 포틀랜트 아트뮤지엄에서 첫개인전을 열었다.
- 1936년 아티스트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과 친구가 된다. 1938년 미국시민권을 취득하고 1940년에 모든 전시에 마크 로스코라고 서명하기 시작했다.
- 1943년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이로 인한 신경쇠약증으로 잠시 병원에 입원한다. 신경쇠약을 추스르기 위하여 포틀랜트로 귀향하던 중에 앞으로 엄청난 영향을 줄 작가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eel 1904-1980)을 만나게 된다.
- 1944년 폐기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이 후원자가 된다.48)
- 1945년 메리앨리스베이슬과 재혼을 하게 된다.
- 1946년 멀티폼(multiform)을 제작한다.
- 1948년 어머니 죽음으로 우울증에 빠져 한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한다.
- 1949년 캘리포니아미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그를 대표하는 양식의 색면화를 알린다.
- 1950년 유럽의 오래된 대가들의 그림과 대성당을 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 1958년 시그램빌딩 내 포시즌 레스토랑의 벽화 제작을 맡아 작품제작을 하였으나 1959년 작품설치장소를 방문한 후 계약을 취소한다.
- 1964년 도미니크 메닐이 로스코스튜디오를 방문하고 휴스턴 로스코채플의 장식을 주문한다.
- 1968년 로스코채플에 들어갈 14점 작품을 완성한다.
- 1969년 부인 메리엘리스와 별거에 들어가면서 집을 나와서 작업실로 이사한다. 시그램 벽화 9점을 테이트갤러리에 기증한다.
- 1970년 2월 25일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자살한다.
- 1971년 로스코채플이 헌정된다.
마크 로스코는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으나 언어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유대인 혐오와 차별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힘든 성장과 과정을 거쳤다. 마크 로스코는 영민하여 초중등과정 9학년 과정을 3년 만에 마치고 고등학교도 단기간에 마치고 예일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유대인차별분위기로 인하여 1년 만에 장학금 박탈이 되어 웨이터, 세탁물 배달원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2년 공부를 마치고 중퇴하고 말았다.49)
이러한 성장과정이 작품과 죽음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 로스코의 대표작품 색면화
필자는 2023. 11. 3.부터 2023. 11. 11.까지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마크 로스코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파리 루이비통 파운데이션을 방문하였다.
로스코의 초기작품부터 말년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어서 로스코의 작품변화와 함께 로스코의 대표적인 색면화를 모두 보게 되었다. 물론 2015. 3. 23.부터 2015. 6. 28.까지 서울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 대규모전을 관람한바 있고50) 세계적인 미술관을 방문투어하면서 항상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대면해 왔으나 이번 파리전시회가 가장 규모가 큰 전시회라고 할 수 있겠다.
로스코는 1946년 신화나 상징주의, 풍경과 인간형상 같은 이전의 주제들을 멀리하기 시작하고 그 대신 형태없는 회화적 의사소통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작품을 그의 사후 미술계에서 멀티폼(multiform)이라고 불렀다. 1940년대 중반작품에서 나타났던 생물형태들은 이제 일시적이고 공간감이 없는 색덩어리에 밀려났다. 이들은 그림 자체의 내부에서 유기적으로 발생한 것처럼 보였다.
로스코는 이런 형태들은 자기표현의 열망을 지닌 유기체라고 부르며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에 이 유기체형태들은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한다고 했다. 로스코는 그림 속 대상들에 일종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 보편적인 표현수단으로 만들었다.
로스코는 “생명의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 뼈와 살의 구체성을 결여한 추상이란 있을 수 없다. 고통과 환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그림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는 생명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51)
마크 로스코에 앞서 클리포드 스틸은 색채대비가 명암대비와 무관하게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틸의 색채-공간은 충분히 개발된 색면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표면의 질감에 대한 촉각적 탐색이 계속되었고 너무 많은 필획이 사용되어 색채-공간의 자유로운 흐름이 끊겼기 때문이다.
색채와 개방성의 문제를 완벽하게 돌파할 길을 찾아낸 화가가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이다. 두 화가는 표면의 질감을 단념하고 회화표면을 지극히 얇게 만들어 촉각적 연상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이로 인하여 색채가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율성을 얻게 되었다.
이제 색채는 더 이상 어떤 부분 혹은 평면을 채우거나 특정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형상과 거리감 등의 모든 규정성을 해소시켜 버림으로써 독자적인 발언을 하게 되었다. 로스코 특유의 화면은 형상과 배경의 관계를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겨 회화성이 촉각성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그림의 표면 가까이에서 떠돌며 머무는 색채의 화면 이른바 색면회화다.52)
(3) 로스코 작품 감상
로스코는 수직구도를 애용했다. 때로는 캔버스의 길이가 3미터를 넘는 경우도 있다. 그는 관람자가 그림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하고 싶어 했다.
로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아주 커다란 그림을 그린다. 역사적으로 커다란 그림은 대게 숭고하고 호화로운 주제를 다룰 때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큰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사실 아주 친근하고 인간적으로 다가서고 싶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아는 다른 화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당신을 자신의 경험 바깥에 세워 놓고 그 경험은 환등기에 의해 비추어진 풍경 또는 축소렌즈로 본 풍경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큰 그림을 그리게 되면 당신은 그 안에 있게 된다. 그것을 당신이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이상적 거리는 45센티미터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작품을 보면 색면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아 색면 내부의 움직임과 경계의 사라짐을 경험하게 되고 불가해한 것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인간 존재의 한계를 뛰어 넘는 자유로 느끼게 될 것이라고 했다.53)
로스코는 1950년대부터 “침묵이야말로 정확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작품에 어떤 설명도 다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울러 말이란 관람자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라고 했다.
로스코는 셀던 로드먼과 인터뷰에서 “나는 추상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는 색과 형태의 관계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비극, 황홀경, 운명같이 근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나의 그림을 보고 울며 주저 앉는 것은 내가 이러한 근본적인 감정들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내가 그리면서 겪었던 종교적 체험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작품의 색채들 간의 관계만을 가지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면 제대로 작품을 감상했다 할 수 없습니다.”54)
로스코의 이 색면화에 대하여 독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을 빗대어 칸트가 말한 숭고함이 있다고 평한다.55)
철학자 한병철은 “아름다움은 은신처다. 아름다움에는 불투명함이 내재한다. 불투명하다는 것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뜻이다. 폭로는 미에서 미술을 제거하고 미를 파괴한다. 따라서 미는 본질적으로 폭로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다.56) 로스코와 통한다고 보여진다.
(4) 로스코 벽화: 포시즌 레스토랑 사건
로스코는 1958년 뉴욕의 파크에비뉴에 있는 시그램빌딩의 고급식당 포시즌레스토랑의 장식벽화제작을 의뢰받고 작품에 3만 5,000달러 중 계약금조로 7,000달러를 받았다.
로스코는 작품성격에 대하여 1959년 존피셔에게 유럽여행중 “그방에서 식사하는 빌어먹을 녀석들의 입맛을 떨어지게 만드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네. 식당에서 내 그림을 거부했다면 최고의 찬사가 되었을 테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지. 현대인들은 무엇이든 다 참을 수 있게 되었어”라고 털어놓았다.
로스코는 유럽여행에서 돌아와서 어느날 아내와 함께 포시즌스레스토랑에 식사하러 갔다가 손님들의 거들먹거리는 식사분위기에 화가 나서 당장 작업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계약 파기와 함께 선금을 돌려줬다.
이것으로 로스코는 작품의 순결성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57)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런던데이트미술관에 9점을 기증하고 일본 DIC가와 무라미술관과 워싱턴내쇼날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는 이 그림들을 보면서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들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강신주의 민음사 마크 로스코 2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5) 로스코의 마지막 작품
로스코는 로스코 채플의 장식화 제작이 끝나고 난 후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이 작품에서 암시되고 있었다.
브레슬린은 1969년 4월 아들을 잃고 로스코 작품에 위로를 받고 작품 1점을 사기 위해서 로스코의 전속 화랑으로 갔다가 지나치게 밝은 빨강과 노랑색으로 그려진 화려한 캠퍼스를 보고 “난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꼼짝 못하고 자리에 앉아만 있었어요.” 그녀는 “그림들은 죽음을 말하고 있다”며 화랑직원에게 “누군가가 그를 잡아줘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로스코는 10개월 후 스튜디오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마지막 작품은 무제 1970년[152.4×145.1cm]이다.(사진 3)
진한 핏빛을 연상시킨다. 거대한 혈관을 가로지르는 번갯불 ! 로스코는 면도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6) 로스코 채플
텍사스에서 유전개발회사를 경영하던 부친의 급서로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은 도미니크 드메닐(Dominique de Menil, 1908. 3. – 1997. 12.)은 명성과 예술에 심취해왔고 그의 남편 존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후원해왔다.58)
드메닐은 1964년 건축가 필립 존슨에게 평화의 공간으로 쓸 카톨릭 채플의 설계를 의뢰하고 아울러 로스코에게 채플을 장식할 벽면화 제작을 의뢰하였다. 로스코는 1968년 채플에 설치될 작품 14점을 완성하나 1970년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함에 따라 1971년에 헌정된 로스코 채플에 설치된 상태의 자신의 작품을 보지 못하였다.
로스코 채플은 8각형의 창문이 없는 소박한 규모의 조그만 예배당이다.(사진 4)
천정은 팔각형으로 빛을 여과해내고 있고(사진 5) 텅빈 홀에 장의자와 방석이 벽면제단화를 따라 놓여있다.(사진 6)
로스코의 벽면에 부착된 회화는 삶과 죽음, 영혼, 회개를 드러내는 검보라색 등 미묘한 색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심플한 예배당 내부의 천정 자연광의 은은한 빛과 대조를 이룬다.
건축과 회화의 대조적인 조화는 로스코 채플을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치유를 제공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건축당시 건축가와 회화가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있었으나 결국 건물이 완공되고 장식화가 천정을 통하여 마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처럼 벽면에 부착되었다.
채플 입구 정면에 위치한 바넷 뉴먼(1905-1970)의 부러진 오벨리스크와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로스코 채플은 2001년 국립유적등록기관에 등재되고 내셔널그래픽사가 선정한 살아있는 동안 방문해야할 가장 평화롭고 신성한 장소이고 2009년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고 강력한 장소 500에 선정되었다.
부러진 오베리스크는 휴스톤시는 휴스톤을 위한 현대조각품 구매를 돕기 위한 기부금을 받았고 1969년 이때 드메닐은 보조금 전액기부를 제안하면서 시청부근에 설치하고 최근에 사망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에게 바쳐지도록 명시하면서 작품을 부러진 오벨리스크를 선택했다.
시는 설치장소와 작품도 동의했지만 킹목사에게 헌정되는 것을 거부했고 그러자 드메닐은 기부를 철회하고 그 조각품을 직접 구매하고 로스코 채플 앞에 뉴먼의 바람대로 거울연못 위에 설치했다.
이 작품은 1963년부터 1967년도에 1차 완성되고 1969년 보강되었다.59)
로스코채플에서 1973년 불교승려가 채플 내에서 결혼식을 주재하였고 또 힌두교도가 전통예술공연을 하였고 1978년 이슬람슈피가 공연하였고 1979년 달라미라마가 강론하고 1991년 드메닐여사가 넬슨 만델라에게 로스코상을 수여하였다.60)
로스코채플은 자기들만의 장소를 갖지 못한 단체들에게 장소를 개방하고 대중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7) 마크 로스코채플 방문
필자와 처, 둘째 자녀는 2023. 5. 25. 로스코 채플을 방문하였다.
먼저 안내데스크에 가서 정보를 제공받고 안내센터 건너편에 위치한 소박한 채플로 갔다. 채플 입구 정면에 위치한 바넷 뉴먼이 제작한 부러진 오벨리스크(Broken Obelisk) 조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채플안 건물로 들어서니 입구 로비 데스크에 성서, 불경, 바가, 바드기타, 도덕경 등이 놓여있었다. 비록 카톨릭 채플이기는 하나 모든 종파를 초월한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로비를 지나 채플홀 안으로 들어갔다. 8각형 벽면에 로스코의 회화작품이 설치되어있었다. 우선 천천히 전체 벽면을 둘러보았다. 실내는 천정에서 내려오는 채광이 있었으나 어두운 편으로 작품의 컬러를 정확히 보기는 어려웠다. 검보라톤의 어두운 색깔이었다.
필자, 처, 자녀는 각자 벽면화 한 곳 앞에 앉아서 묵상에 들어갔다. 1시간 이상이 흘러갔다. 장의자에 앉은 필자 앞에 있는 방석에 앉은 딸아이는 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몸을 뒤로 돌려 처를 보니 처 역시 눈물을 훔친 것으로 보였다. 필자만 의식이 명징하였다.
자녀가 일어나자 우리 모두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니 부러진 오벨리스크 부근에 청춘 couple 중 남자가 울고 여성이 위로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바넷뉴먼의 부러진 오벨리스크 작품에서 피라미드는 사각형의 연못 위에 세워져있고 부러진 오벨리스크 꼭지점과 피라미드 꼭지점이 서로 접합되어 있다.
우선 위태롭다는 느낌이 다가온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고왕국의 파라오의 무덤이자 권력의 상징이다. 이 피라미드가 땅이 아닌 물위에 서있다는 것은 기존 권력의 위태로움을 나타낸다. 오벨리스크 역시 파라오의 치적기념비인데 부러져서 거꾸로 서있다는 것 역시 기존 권력을 향해 도전하고 있으나 미완성이라는 의미가 다가왔다. 이 기념비는 미국 남부의 흑인 인권신장을 위하여 투쟁과 헌신하다가 순교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설치된 배경을 가지고 보면 피라미드는 이미 설 자리가 위태로워진 정의롭지 못한 기득권이고 이에 대하여 도전하는 마틴 루터 킹의 전도된(새로운) 오벨리스크가 미완성인 상태의 기념비가 된다.
바넷 뉴먼이 이를 의식하고서 제작하였는지 알 수가 없으나 위대한 작가의 영감이 이곳으로 이끌고 이를 알아본 컬렉터가 그 작품이 안식할 공간을 열어주게 된 것이다.
모든 권력의 바탕은 유연성을 가진 물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상선약수(上善渃水)가 정당한 권력의 원천이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로스코채플의 안내문에 따르면 “부러진 오벨리스크는 인권과 사회정의에 대한 로스코 채플의 헌신을 나타내며 이 숭고한 가치를 구현하는 삶과 소명을 다하는 위대한 사람을 기린다”고 한다.
수많은 구호보다 단 1개의 예술품이 보여주는 보다 더 강력한 힘이다. 너무 멀리 떨어진 로스코채플에 갈 수 없는 분들에게 일본 DIC 가와무라기념미술관(나리타공항에서 가까운 치바현 사쿠라시 소재)에 있는 로스코방에 가서 명사의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마크 로스코재단은 대부분 작품을 미국워싱톤DC내셔널갤러리에 소장하도록 했다. 드메닐 부부는 그림감상과 수집을 하면서 모은 예술품 17,000점을 대중과 함께 즐기는 차원 동양의 여민동락(與民同樂)정신에서 텍사스 휴스턴 12만제곱미터부지에 메닐캠퍼스를 조성하였다. 로스코 채플 이외에 메닐컬렉션, 사이트웜블리갤러리, 댄플래빈전시관, 비잔틴프레스코채플을 25년에 걸쳐 세웠다. 이 미술관은 모두 무료입장이다. 컬렉션의 질도 뛰어나다.
메닐컬렉션의 건물은 프리츠카상에 빛나는 세계적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하였고 건축물도 드메닐의 철학에 부합되게 입구에 계단이 없는 이 통행로에서 건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대중친화적이고 개방적인 형태로 지어져 아름답다.
(8) 마크 로스코 작품 가격
참고로 미국의 석유재벌 데이비드 록펠러가 소장한 로스코의 화이트센터가 2007년 소더비경매에서 72,840,000달러(당시 한화 675억원)에 낙찰되고(사진7) 2021. 11. 소더비경매에서 1951년작이 82,468,500달러(당시 한화 974억 6,000만원 상당), (사진8)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에 포함된 “붉은색 위에 흰색”은 500억원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사진9)
필자는 비록 발터 벤야민이 말한 원본에 있는 아우라는 없지만 2015년 한가람미술관전시회때 복사본 1점(사진10)을 구입해서 사무실에 걸어두고 보고 있다.
Ⅳ. 맺는말
오늘날 자본주의 삶은 너무나 경쟁적이고 소모적이며 속도전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도 심플하고도 절제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의 길을 모색하는 분들에게 이러한 삶을 실천한 소로우, 니어링 부부를 법정스님을 통하여 소개하고자 하였다. 또 문학과 예술이 우리에게 숨 쉴 틈을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각주
- 1) 법정,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1993) 64쪽
- 2) 소로우(강승영 옮김) 월든(이레 1993) 소로우의 연보 참조
- 3) 소로우(강승연 옮김) 월든 107-108쪽
- 4) 미국내 노예제도는 남북전쟁(1861-1865)에서 링컨이 1863년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1865. 4. 18. 북군이 승리함으로써 폐지되었다.
- 5) 미국이 멕시코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1846-1848에 벌어진 전쟁으로 미국이 승리하고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유타, 네바다주, 콜로라도 일부주를 획득하였다.
- 6) 소로우가 구속되자 지인이 대납함으로써 석방이 되었다.
- 7) 소로우(강승영 옮김), 시민의 불복종(이레 1999) 9쪽
- 8) 소로우(강승영 옮김), 시민의 불복종(이레 1999) 12-13쪽, 33-34쪽
- 9) 소로우(김욱동 옮김) 소로의 속삭임(사이언스북스 2008) 109-110쪽
- 10) 소로우(류시화 올림)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오래된 미래 2005) 20-23쪽
- 11) 법정, 산방한담(2001년 개정판 전자책) 38쪽,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1996 샘터) 257-258쪽
- 12) 효봉의 속명인 이찬형은 일제시대에 평양복심원 판사로 근무하면서 한 사형판결이 오판임을 인지하고 판사직을 사직하고 엿장수로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다가 승려로 출가하였다.
- 13) 법정,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1984 전자책) 2쪽, 득도는 도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고 사바세계에서 청정세계로 나아갔다는 삶의 전환을 의미한다.
- 14) 법정, 서있는 사람(1978 전자책) 176쪽
- 15) 법정, 맑고 향기롭게(전자책) 34쪽
- 16) 법정, 텅빈충만(1989 전자책) 56쪽
- 17) 법정, 영혼의 모음(1972 전자책) 55쪽, 무소유 첫구절이 간디의 말로 시작된다.
- 18) 법정,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289쪽
- 19) 그러나 법정스님의 모든 글과 책은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홈페이지에 무료로 공개되어있다.
- 20) 흔히들 고승이 죽으면서 남기는 시형식으로 된 말을 임종게라고 한다. 법정은 사망당시가 아니면 임종게라 할 수 없으므로 죽기 상당기일전에 쓴 글을 임종게라고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유언이라고 함이 타당하다고 한다. 법정, 아름다운마무리(전자책) 110쪽
- 21) 법정은 진실되기도 하고 겸손하게도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고 있다.
- 22) 이름난 명성가들에 사후에도 통상적으로 그의 재단을 통하여 그 저작물의 인세를 관리하고 있다. 법정은 사후 그의 저작이 영리화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저작물은 모두 맑고 향기롭게 홈페이지를 통하여 무료로 개방되었다.
- 23) 그의 스승 효봉의 임종게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를 성철의 임종게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였으니”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가 아닌 진실한 말의 낙처를 알아야 할 것이다.
- 24) 대승불교의 원력이 4홍서원중 불도무상서원성을 말한다.
- 25) 제자들에 대한 참회로서 스승의 아름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음속 등불에 의지하여 수행정진을 당부하고 있다.
- 26) 위계를 정하고 덕을 쌓고 화합을 부촉하고 있다.
- 27)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유교의 종법제도를 본받아 상좌제를 도입하였다.
- 28) 주변에 있는 수고한 분에 대한 배려로 보여지고 있다. 이것이 법정이 보여주는 대승불교의 자비정신이다.
- 29) 법정의 아름다운 마무리 (임종게와 사리) 233쪽
- 30) 법정 무소유(전자책) 11쪽
- 31) 법정 서있는 사람(전자책) 마하트마 간디의 종교 138쪽
- 32) 법정,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마하트마간디의 오두막 296쪽
- 33) 법정,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마하트마간디의 오두막 64쪽
- 34) 법정,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마하트마간디의 오두막 61쪽
- 35) 법정, 일기일회(문학의 숲 2009) 197쪽
- 36)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에서 2023. 9. 14.부터 2024. 2. 12.까지 가장 진지한 고백, 장유진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 37) 법정,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문학의숲 2009) 326쪽
- 38) 법정,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문학의숲 2009) 161, 135쪽
- 39) 법정, 아름다운 마무리, 겨울자작나무 138쪽, 간소하게 더 간소하게 137쪽
- 40) 법정, 한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 296-300쪽
- 41) 법정, 서있는 사람들(전자책) 19쪽
- 42) 류시화 번역분이 2000년 보리출판사에서 나왔다.
- 43) 존 살트마쉬, 스코트니어링 평전(보리 2004) 425쪽
- 44) 제임스 엘킨스, 그림과 눈물(아트북스 2007) 20쪽
- 45) 윤혜정, 인생, 예술(을유문화사 2022) 32쪽
- 46) 2015년 전시회도록 믿음사 마크 로스코 1권(205) 35쪽 이하
- 47) 로스코에 대한 국내번역전기로 프란체스코 마테우치, 마크로스코(이음 출판 2023) 참고
- 48) 전설적인 컬렉터이자 베네치아 페기구겐하임미술관 설립자이기도 하다.
- 49) 제이콥 발테슈아, 마크 로스코(마드리에북스 2023) 21-22쪽
- 50) 이때 전시도록은 민음사 마크로스코 1권, 2권으로 나왔다.
- 51) 제이콥 발테슈아, 위의 책 45쪽
- 52) 조주연, 현대미술강의(큰항아리 2017) 159-160쪽
- 53) 제이콥 발테슈아 위의 책 46쪽
- 54) 제이콥 발테슈아 위의 책 57쪽
- 55) 강신주, 마크 로스코 2권 84쪽, 존폴스토나드 거의 모든 순간의 미술사(까치 2023) 418쪽
- 56)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 지성사 2016) 45쪽
- 57) 제이콥 발테슈아 위의 책 62쪽
- 58) 이영란, 슈퍼컬렉터(학고재 2019) 메닐부부편 참조
- 59) 자세한 연구는 박은영 바넷뉴먼의 부러진 오벨리스크 기념비적 성격을 중심으로 미술사학보고 8 집 (2007) 참조.
- 60) 민음사 마크로스코 1권 1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