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07. 9. 14. 김태훈 기자
1990년 현직 법관으로선 처음으로 형법 241조 간통죄 위헌제청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헌법재판소도 새로운 판례 변경이 필요할 겁니다.”
형법 241조 간통죄가 ‘법의 심판자’인 현직 법관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서울북부지법 도진기 판사에 이어 대구지법 경주지원 이상호 판사도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는 등 법원 내부에서조차 ‘낡은 시대의 유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다. 그래선지 헌법재판소가 앞서 3차례 합헌으로 결정했다지만, 4번째인 이번 만큼은 헌재 내부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다.
우리 사법사상 간통죄가 처음 위헌심판대에 오른 것은 1989년. 법원의 위헌제청이 아닌 일반 국민의 헌법소원(89헌마82) 형식이었다. 이듬해 9월 헌재는 관여 재판관 6 대 3으로 합헌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이 결정이 나오기 2개월 전쯤 부산지법의 한 판사가 간통죄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그간 ‘간통죄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은 있었어도 현직 법관의 위헌제청은 처음이기에 파장이 대단했다. 지금은 부산 동아대 법대 교수로 일하는 김백영(51·사법시험 26회·사진)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1990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간통죄는 위헌이라고 봅니다.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이번에 두 하급심 판사가 저 이후 17년 만에 위헌제청을 냈는데 그분들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김 변호사 주장의 핵심은 ‘사회가 성숙할수록 개인 자유의 폭이 넓어지고 국가 개입은 극소화돼야 한다’는 것. “술 때문에 피해가 막심하다고 해서 정부가 국민들이 술을 못 먹게 할 수는 없잖아요? 과다한 음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면 그런 조치에 동의하겠지만 많은 이들은 동의하지 않겠죠.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도란 없습니다.”
물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김 변호사 또한 ‘간통할 자유’까지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간통죄 존폐와 상관 없이 개인들 스스로 끊임없이 윤리의식을 고양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직 판사로선 처음 간통죄에 대한 헌재의 판단을 요청한 점 때문에 일정한 ‘불이익’도 감수해야 했다고. 그가 위헌제청을 낸 것은 간통죄에 대해 대법원이 사실상 ‘합헌’ 판결을 내린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신설 기관이나 다름없는 헌재와 ‘최고 사법기관’ 지위를 놓고 서로 견제하며 일종의 ‘영역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김 변호사의 행동은 법원 수뇌부에겐 ‘괘씸죄’로 보일 만도 했다. 더욱이 1990년의 법원 내부 분위기는 지금처럼 자유롭지 않았다. “위헌제청을 하니까 기자들이 몰려와요. 제가 배경을 이야기하니 신문에 크게 보도됐죠. 윗분들로선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해야 하는데 왜 그러냐’, ‘법원의 위신이 훼손됐다’ 등등…. 조직 논리로 봐선 제 행동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죠.”
이후 김 변호사는 대전지법 서산지원으로 전보돼 그곳에서 법복을 벗었다. 위헌제청으로부터 딱 7개월 만인 1991년 2월21일의 일이었다. 그래도 김 변호사는 자신이 ‘괘씸죄’에 걸렸다는 세간의 시선을 거부한다.
“대법원, 그러니까 상급심 판결이 나온지 얼마 안 됐는데 하급심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법적 안정성을 해친다는 우려가 있었을 겁니다. 서산지원으로 가면서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공무원은 조직의 명령에 따라야죠. 그리고 그 문제 하나로 판사를 그만둔 것도 아닙니다. 색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 등 다양한 원인이 있었죠.”
간통죄가 여전히 위헌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심지어 여성단체들조차 그 폐지를 촉구하는 현실을 보면서 간통죄의 위헌성을 제기한 최초의 법관이란 점에 자부심도 느낀다고. 간통죄 때문에 유명세를 치렀는데 혹시 변호사가 된 뒤 관련 사건을 많이 수임하지 않았을까. 김 변호사의 대답은 의외로 ‘노’였다.
“정작 간통죄 사건은 거의 안 맡았습니다. 우리나라 소송 문화가 재판부와의 인간 관계를 감안해 변호사를 선임하지, 어떤 변호사가 그 분야에 전문성이 있다고 해서 의뢰하진 않으니까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