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법조] 2020. 6. 16. 변호사 김백영
변호사 업무의 수임 및 업무처리와 관련하여 고전에서 발견한 몇 가지 시사점을 들려드리고자 한다.
1. 활과 방패
‘맹자’ <공손추장구 상>을 보면 ‘맹자’ 왈
矢人豈不仁於凾(函)人哉 (시인 기불인어함인재)
시인(矢人, 화살 만드는 사람)이 어찌 함인(函人,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어질지 못하겠는가마는
矢人惟恐不傷人 (시인 유공불상인)
시인은 행여 사람을 상해(傷害)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凾(函)人惟恐傷人 (함인 유공상인)
함인은 오직 사람이 상해(傷害)를 입을까 두려워하니
巫匠亦然 (무장 역연)
무당과 관 만드는 목수도 또한 그러하다.
故 術不可不愼也 (고 술불가불신야)
그러므로 기술을 선택함에 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성백효, 맹자집주, 전통문화연주회 153~154쪽)
칼이라도 살인검이 될 수 있고, 활인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판사, 검사, 변호사 중에서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면 가장 사람을 살리는 직업은 변호사가 아니겠는가? 변호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사람 살리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2. 바리새인과 세리
신약성서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다음과 같은 예수의 설교가 보인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였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하시니라.
바리새인(Pharisee)은 율법주의자를 말한다. 법을 잘 지키고 모범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자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반면 세리(稅吏, tax collector)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식민지 유대에 대한 세금 징수를 맡은 청부업자로서 식민지 수탈의 첨병이었다.
예수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받아들인바 있고, 우월감을 가지고 민중과 괴리된 법률가를 질타하시는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사연으로 식민지 세리를 하면서도 양심적인 가책을 가지고 참회의 삶을 살고 있는 세리의 어려움을 감싸준 것이다. 변호사는 우리 주위의 형사 피고인을 변호할 때 뒤돌아봐야 할 마음가짐에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3. 아르주나의 전쟁 실행
힌두교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Bhagavadgītā)는 아르주나가 친인척을 상대로 한 전쟁을 주저하고 있을 때 크리슈나는 전쟁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를 옮겨보기로 한다.
아르주나: 내 사지는 맥이 풀리고, 입은 타 마르고, 몸서리치고 머리털이 곤두섰습니다. 활은 내 손에서 떨어지고, 내 살갗에는 불이 일고 몸을 버티고 설 수 없고, 내 마음은 비틀거렸습니다. 불길한 징조가 내다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친족과 싸움해 죽이고 좋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크리슈나님, 나는 승리도 왕국도 쾌락도 다 원치 않습니다.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즐거움인들 생명인들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권세를 원하는 것도, 향락과 쾌락을 원하는 것도 그들 때문인데, 그 사람들이 여기 생명과 재산을 내던지고 싸움을 하겠다고 섰습니다. 스승들, 아버지들, 할아버지들, 아들들, 손자들까지 그리고 백숙부들, 장인들, 내외종형제들, 그 밖의 여러 친척들 그들을 내가 죽일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들 손에 죽을지언정. 삼계의 왕권을 준다 해도 나는 못합니다. 하물며 이 티끌세상의 나라를 위해서겠습니까?
이들 드리타라슈트라(친족)의 아들들을 죽이고 무슨 쾌락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비록 흉악범이기는 하더라도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오직 죄를 지을 뿐입니다.
이하 생략
크리슈나: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혜의 말을 했다. 어진 이는 죽은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고 산 자를 위해서도 슬퍼 않는다. 나는 일찍이 있지 않았던 때가 없으며, 너도 저 왕들도, 또 이 앞으로도 우리가 있지 않게 될 때는 없을 것이다. 이 몸의 주인은 여기서 어린이와 청년과 어른의 시대를 지내듯이, 그렇듯이 또 다른 몸을 가지는 날이 온다. 어진 이는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는다.
감관(感官)이 대상과 접촉하면 차고 덥고 즐겁고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것은 오고 가는 것이어서 덧이 없다. 그것을 견디어라. 사람 중에 으뜸인 사람아 그런 것들을 견디어내고 쾌락과 고통을 꼭 같이 보는 사람, 그런 어진 이는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이다.
비유(非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이 유(有) 아닐 수 없다. 이 둘의 궁극은 참다움을 본 이에 의해서만 보일 수 있다. 너는 알라. 이 모든 것 속에 속속들이 들어 있는 것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물건이다. 그 변할 수 없는 것을 아무도 꺼버릴 수 없을 것이다. 영원불멸이요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이가 몸을 쓰고 와 계시는 이 몸들은 끝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싸워라. 이것을 죽이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이것을 죽임을 당하는 자로 생각하는 이도, 다 같이 참을 모르는 이다. 이는 죽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느니라.
그는 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으며, 일찍이 나타난 일이 없으므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불생(不生)이요 상주(常住)요 항구(恒久)요 태극(太極)이다. 몸이 죽임을 당하는 때에도 그는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다.
사람이 만일 이것은 무너뜨릴 수도 없고 영원이요 불생이요 불멸인 줄을 안다면, 누구를 능히 죽이며 누구를 능히 죽일 수 있게 하겠느냐? 사람이 마치 낡은 옷을 버리고 새것을 입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이 몸으로 사시는 혼도 낡아버린 몸들을 버리고 다른 새것으로 옮겨가신다. 칼이 그것을 찍을 수 없고, 불이 그것을 태울 수 없고, 물도 그것을 적실 수 없으며, 바람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찍을 수 없는 것이 이것이오, 태울 수 없고 적실 수도 없으며 말릴 수도 없는 것이 이것이다. 그것은 영원이요 두루 차 있음이요 불변이요 부동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이다.
그는 나타나 뵈지 않는 이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요 변함이 없는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그이인 줄 알진대 너는 근심하지마라. 난 자는 반드시 죽는 것이요, 죽은 자는 반드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는 근심하지마라.(함석헌 주석, 바가바드기타, 한길사 84~103쪽)
크리슈나는 법률가들에게 세상 법에 대하여 어쩔 수 없이 단죄하여야 할 자를 상대로 한 소송이나 심판을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용기를 주고 있다.
4. 유마힐 거사의 죄에 관한 법문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약칭 유마경維摩經) 제자품(弟子品)에 부처의 10대 제자 중 계율제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우파리와 붓다 간의 대화에서 유마힐 거사의 법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김윤수 역주, 설무구칭경·유마경, 한산암 552쪽 이하)
붓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병문안을 하라.
우파리: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제가 과거에 어떤 두 비구가 율행을 범하고 부끄러워서 붓다에게 감히 묻지 못하고 저를 찾아와서 물었을 때의 일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곧 그들을 위해 여법하게 해설하여 주었습니다.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유마힐: 존경하는 우파리님, 이 두 비구의 죄를 더 늘리지 마십시오. 바로 없애 주어야지, 그들의 마음을 요란시켜서는 안됩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그 죄의 성품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이 때묻기 때문에 중생이 때묻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도 청정해집니다. 마음도 역시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그러하듯이 죄의 때 역시 그러하고, 모든 법도 역시 그러해서 여(如)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파리님 같은 경우 마음의 모습으로 해탈을 얻었을 때 정녕 때가 있었습니까?
우파리: 그렇지 않습니다.
유마힐: 일체 중생의 마음의 모습에 때가 없는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존경하는 우파리님, 허망한 생각이 때이고 허망한 생각 없는 것이 청정이며, 전도가 때이고 전도 없는 것이 청정이며, 나를 취하는 것이 때이고 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청정인 것입니다.
일체법은 생멸하면서 머물지 않는 것이 환상같고 번개같으며, 모든 법은 서로 기다리지 않고 나아가 한 순간도 머물지 않으며, 모든 법은 모두 허망하게 보는 것이 꿈같고 아지랑이같으며, 마치 물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영상과 같이 허망한 생각으로 일어난 것이니, 그가 이렇게 아는 자라면 계율을 받든다고 이름하고, 그가 이렇게 아는 자라면 잘 이해한다고 이름합니다.
두 비구: 높은 지혜로구나. 이것은 우파리님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니, 계율 지님에 있어 최상이라고 해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두 비구는 의심과 후회가 곧 사라졌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을 의미하는 불교 교리)에 대한 마음을 일으켰다. 일체의 중생이 모두 이러한 변재를 얻게 되기를!
소승불교는 계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수행의 요체를 삼는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보니 계율 위반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한 대승불교는 죄의 공함을 밝혀 일시에 죄로부터 벗어나는 위대한 선언을 하였다. 유마힐은 인도의 재가의 거사로서 이른바 세간을 벗어난 소위 전문출가수행자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자이다. 세속법의 위반자에게 너무 심하게 몰아붙일 것은 아니다. 두 비구처럼 회심하면 찰나 간에 죄가 소멸되는 것이다. 참고로 중국에는 방온(龐蘊) 거사가 있고, 한국 신라에는 부설(浮雪) 거사가 있었다.
5. 혜각 선사의 무죄
광효원(光孝院) 혜각(慧覺) 선사와 백정과의 문답이다.(이계묵, 선의 뜰에서 거닐다 1권, 운주사 349쪽)
백정: 有人問, 某甲平生愛殺牛, 還有罪否. 스님, 저는 평생 소 잡는 업을 짓고 살았는데 죄가 있습니까?
혜각: 無罪. 죄가 없다.
백정: 爲什麽無罪. 어찌하여 죄가 없습니까?
혜각: 殺一箇, 還一箇. 하나를 죽였지만 하나를 살렸기 때문이다.
불교의 제1계명인 불살생(不殺生)을 초월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죄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죄는 누가 만든 것인가? 죄의 실상은 무엇인가? 불법(佛法)을 알게 되면 포정(庖丁)같이 소를 가장 잘 알고 소를 가장 편안하게 보내주게 되는 것이다. 선종의 위대함은 일상생활을 그대로 수용하여 직업의 귀천을 넘어서 삶을 긍정하는데 있다. 비록 선종이 중국에서 태동하였지만, 문자불교 또는 성상(불상)불교를 넘어서서 원시불교가 지향하던 삶에서 고통을 벗어나는 그 법을 바로 지금 여기서 구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불교는 퇴화하여 껍데기만 남았다고 비판받고 있는 상황이다.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