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26. 변호사 김백영
헌법재판소는 2009헌바17 사건을 비롯한 관련 병합사건에서 2015. 2. 26. 형법 제 241조의 간통죄 조항에 관하여 위헌결정을 선고하였다.
재판관 9인 중 7인은 위헌의견 2인은 반대의견을 개진하였다(위헌 : 박한철,이진성,김미수,김창종,강일원,조용호,서기석 합헌 : 이정미,안창호)
필자는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1990. 6. 29. 간통죄를 혐의사실로한 구속영장청구사건에서 간통죄에 관하여 위헌제청결정을 하고 영장발부를 거부하였고, 당시 법원의 최초의 위헌표명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위헌제청 결정문은 아래와 같고 이번 위헌의견도 필자와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부산지방법원 위헌제청결정(영장번호 5041.5042)
[주문] 피의자들의 간통죄 피의사실에 대한 위 각 구속영장청구사건에 대하여 형법 제241조 제1항의 위헌여부에 대한 심판을 제청한다.
[이유](사실관계생략)
형법 제241조 제1항은 「배우자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고 되어 있는 바, 이는 성도덕내지 건전한 성적풍속의 유지를 보호법익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동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동법 제37조 제1항은 국민의 자유와 개성신장을 추구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격체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면, 이에 부수하여 스스로의 자유로운 성적행동에 관한 자기결정권도 보장된다고 볼 여지도 있고, 특히 혼인생활이 파탄에 이르러 형식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을 경우에도 자기결정권을 박탈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침해하거나 성적행동에 대한 국가형벌권의 개입으로 인하여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도 침해할 우려와 여지도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동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의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기본권제한의 한계를 명시하고 있다. 간통에 대하여 민사적인 책임이외에 국가가 개인의 애정문제 등 사생활에 개입하여 이를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도덕적.윤리적인 사항을 형벌에 의하여 강제하는 것이 되어 기본권 제한원리인 과잉금지원리에 위배될 소지도 있다.
나아가 간통죄를 친고죄로 함으로써 이에 대한 소추권발동이 간통자의 배우자 등의 사적감정에 의한 고소여부에 따라 좌우됨으로써 파행적으로 운여오디거나, 제도외적 목적으로 남용되는 경우도 있을 뿐만 아니라 고소취소가 없는 한 형사사법 실무관행상 이에 대하여는 대부분 구속과 실형선고를 하고 있음을 아울러 고려해 볼 때 간통을 형벌로 다스린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점도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형법 제241조 제1항의 규정은 위 헌법의 규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고 인정되므로 헌법재판소법 제41조 제1항에 의하여 직권으로 헌법재판소에 위 조항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여부의 심판을 제청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정한다.(1990년 6월 29일 판사 김백영)
필자가 위헌제청한 사건은 1993. 3. 11. 90헌가70으로 합헌결정으로 마무리 되었다.(합헌 : 조규광, 김문희, 황도연, 변정수, 김진우, 최광율, 위헌 : 한병채, 이시윤, 김양균)
간통과 관련하여 불교의 5계중 불사음계나 기독교의 10계중 간음하지 말라는 종교상의 계율이 있고, 로마법과 게르만법에서 형사처벌을 해왔다. 원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천되자 남성은 혈통을 보전하고 상속을 지키고자 처의 간통을 금지하고 상간자를 처벌하였다. 그리하여 처벌대상은 남편있는 부녀자와 상간자이고, 남편이 독신녀와 간통하는 것은 문제삼지 않았다. 1905. 4. 대한제국법률 제3호로 공포된 형법대전과 1912년 제정된 조선형사령에 의한 의용형법(구형법)에서도 처의 간통만을 처벌하였다.
구형법인 일본의 형법은 1947년에 간통죄를 폐지하였다. 우리나라도 1953년 형법제정시에 간통죄처벌을 두고 국회의원 재석110명 중 57표를 얻어서 과반수에서 1표차이로 통과가 되었고, 남녀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남편과 처를 구분하지 않고, 상간자를 동등하게 처벌하도록 하였다.
필자가 1990. 6. 29. 위헌제청을 한 이래 헌법재판소는 이번결정에 앞서 여러차례에 걸쳐 합헌선고를 하였으나 2008. 10. 30. 결정시에는 위헌 5명, 합헌 4명으로 위헌의견이 과반수를 넘었으나 헌법이 정한 위헌정족수 6인의 위헌의견을 얻지 못하여 위헌결정을 하지못했을 뿐이다.(2007헌가17외5건 위헌: 김종대, 이동흡, 목영준, 김희옥, 송두환 합헌: 이강국, 이공현, 조대현, 민형기)
2008년 결정시에 이미 가까운 장래에 위헌결정이 예상이 되었다. (그간의 진행과정은 이범준 헌법재판소103-113쪽을 참조)특히 2014. 5. 20. 헌법재판소법제 47조 제3항 단서를 신설하여 형벌에 관한 위헌결정의 소급효를 제한한 것은 이미 조만간에 간통죄 위헌결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였다.
간통죄의 역사적 연원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유부녀만을 처벌하여 온 점에 비추어 간통죄가 결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그 당시 간통죄사건의 수사현실을 보면 상류층의 경우에는 남편의 탈선은 묵인되거나 합의로서 해결이 되어 형사재판을 받는 사례가 드물고, 반편에 주로 재판을 받는 사례는 서민과 부녀자의 탈선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수사과정에서 흥신소직원의 고용과 미행 간통형장을 덮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진찍기와 증거물채취로 인간존엄성의 상실. 구속과 형사처벌을 둘러싼 합의금흥정 등 여러 폐해가 노출되었다.
필자가 취급한 사건 역시 남편의 폭력으로 힘든 생활을 하는 부녀자가 위로 받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간통이었다. 필자는 형벌이란 개인생활에 최소한도로 개입되어야한다는 형벌자제주의에 입각해 있으며, 조선은 유학을 국시로 하였고, 사회질서는 형벌보다는 예(禮)에 입각하고, 덕에 의하도록 하였다. 간통은 혼인계약위반이므로 계약위반에 따른 혼인해소, 손해배상, 재산분할등 민사법적으로 해결하여도 된다고 보았다.
필자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간통죄 폐지를 위한 법적 공론화를 위하여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한 것이었다. 위헌제청결정이 나고 법원 출입기자가 그 결정배경을 알고자 판사실로 찾아오고, 배경설명이 신문에 대서 특필되는 등으로 인하여, 필자는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법관은 판결로서 말한다.”라는 불문율을 어긴것이 되어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으로 전보되어 6개월 근무 후 사직하였다. 지금은 법원도 공보판사 제도를 두어서 법원의 판결배경등을 자세히 언론에 설명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어 격세지감이 든다.
필자가 간통죄 위헌제청한 것은 “한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하여 봄이 온것은 아니지만 한 마리의 제비가 오면 곧 봄은 오고야 마는 법이다” 라는 심정으로 한 것이다.
이제 간통죄는 폐지 되었지만 지금이야말로 형벌의 위하력이 아닌 배우자에 대한 존중과 충실, 본능의 컨트롤에 의한 자기책임을 다하는 성숙한 인간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