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세한도> 감상기

[부산법조] 2021. 4. 19. 변호사 김백영

Ⅰ. 머리말

2021. 3. 13. 국립중앙박물관 ‘한겨울 지나 봄 오듯 – 세한(歲寒) 평안(平安)’ 특별전에 다녀왔다. 이 특별전의 하이라이트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 전시라고 하겠다. 이 전시회는 당초 2020. 11. 24.부터 2021. 1. 31.까지 예정이 되었으나 코로나19로 전시가 2021. 4. 4.까지 연장되었다.

이 <세한도>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평가받고 있는데 국보 180호로 등록되어 있다. 필자의 사무실에 세한도 영인본을 걸어두고 있는데 마침 <세한도> 원본 전시회를 본 소감을 공유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세한도>는 단순히 그림으로만 봐서는 그 진면목을 알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추사의 유배지에서 삶과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여야 비로소 <세한도>의 진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 췌언을 늘어놓게 되었다.

Ⅱ. 전통 문인화(文人畵) · 서화동원(書畵同源)

조선시대 회화는 전문적인 직업화가와 문인화가로 구분이 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직업화가는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으로 중인계급이고, 문인화가는 취미로 그림을 그린 사대부 출신이다.1) 화원은 전문적인 기량 내지 기능이 우선이었으나, 문인화가는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하여야 하고 기상 내지 정신이 중요시 되었다. 선비는 문사철을 전공으로 하고 시서화(詩書畵)를 교양으로 삼는다.2) 『논어-팔일편』에 ‘회사후소(繪事後素)’란 문구가 보인다. 문인화의 특징은 전신사의(傳神寫意)를 기조로 한다. 작가의 정신과 뜻을 화폭에 드러내는 것이고, 바깥사물을 객관적으로 정밀히 묘사하는데 있지 않다.3)

한자문화권에서 글씨와 그림을 서화동원(書畵同源)으로서 한 뿌리로 본다.4) 글씨는 또 하나의 그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한 까닭에 각종 서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민화의 문자도를 들 수 있다.

. 추사의 학문과 제주도 유배

추사의 이름은 김정희(金正喜)이고, 정조 10년(1786년)에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나서 철종 7년(1859년)에 졸하였다.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승설도인(勝雪道人), 병거사(病居士), 과노(果老) 등이다. 추사는 영조의 외증손자로 그의 가문은 종척으로서 1809년 나이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경(북경)에 갈 때 자제군관 자격으로 부친을 따라 동행하게 됨에 따라 60일간 체류하면서 중국의 경사 옹방강, 완원과 교우하게 되어 국제적인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고,5) 그가 순조 19년(1819년) 문과에 급제하자 출세 길이 보장된 듯 보였다. 추사는 다산에게도 배웠으며 유학에 안주하지 않고 최신 학문인 고증학, 금석학에도 조예를 보이고,6) 불교의 이치도 깊이 공부하여 고승과도 교류를 하였다.7)

그러나 생부 김노경과 추사의 요직으로 일관된 출세는 급기야는 질시와 탄핵으로 이어져 김노경이 1830년 고금도로 유배를 가면서 추사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1833년 해배되고 1835년 복직한 김노경이 1837년에 사망하고 나자 1840년 안동 김문의 김홍근이 10년 전의 윤상도 옥사의 재조사를 요구하였고, 국청 과정에서 추사가 윤상도 상소의 배후로 이름이 거론되자 추사는 위리안치 유배 판결을 받고8)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 대정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에서 1851년까지 강상(江上)으로 이배되고, 1851년부터 1852년까지 북청으로 재이배되고, 1852년에 해배가 되어 과천으로 돌아와 1856년에 서거하였다.9)

조선시대 형벌은 대명률에 의하여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로 구분되었다. 태형은 경범죄 죄인에게 회초리로 등 또는 종아리를 때리는 형이고, 장형은 경범죄보다 조금 중한 죄에 대하여 곤장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형이고, 도형은 감옥에서 노역에 종사하는 징역형이고, 유형은 사대부에 대하여 서울로부터 일정 거리의 외곽에 있는 곳에 격리시키는 형이고, 사형은 죽이는 형벌로서 일반인은 참수 또는 교형이 원칙이나 사대부 정치범에 대하여는 사약을 내리는 방식이 많았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이고, 유교가 국교이므로 효(孝)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몸과 머리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거나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논어-태백편』)”에 근거해서 신체의 훼손을 가져오는 형은 가능한 피하였고, 그러한 까닭에 1895년에 실시된 단발령에 대하여 선비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왔고 오늘날에도 부검에 부정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

조선은 사대부가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정치에서 배제되는 유배형은 정치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유배형은 일정한 지역에 주거가 제한될 뿐이므로 주거와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데 오늘날 공민권 제한부 보호관찰과 유사하다.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교통이 불편하고 토지가 척박하여 물산이 부족하고 기후도 육지와 달라서 풍토병 등으로 생활여건이 매우 좋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최악의 유배지에서 유형 생활을 하는 데 따른 울분은 얼마나 컸을까!

이러한 곳에 유배생활 하는데 물질적인 여건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주위에 교류할 지식인도 거의 없는 문화적 환경도 좋지 않았을 것이고, 이점이 추사를 더욱 더 고립감과 외로움으로 힘들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독서와 서예로 소일하면서 정진하였고 추사체를 완성하게 되고 정신적으로 독존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고난의 추사에게 큰 힘이 된 사람이 제자 역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다. 우선은 추사가 읽고자 원하던 책 『만학집』, 『대운산방문고』, 『황청경세문편』(요즘으로 보면 국제적 최신간)을 어렵게 거금을 주고 구하여 추사에게 갖다드려 지적인 허기를 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추사는 1844년 우선의 배려에 느낀바가 있어서 조선지 조각을 이어 붙여 우측에 <세한도>를 그리고 좌측에 장문의 문장을 쓰고 덧붙여 작품을 제작했다. 그림은 거친 편지지 3조각을 사용하고, 글씨는 윤기나는 고급지 1장을 사용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다.

Ⅳ. <세한도>의 구도와 기법

[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 수묵화, 23×69.2cm]
[추사 김정희, <세한도> 그림 부분]

<세한도> 그림의 우측 상단에 ‘세한도(歲寒圖)’란 화제를 행서기가 있는 예서로 크고 당당하며 세련되게 쓰고, ‘우선시상(藕船是賞)’을 예서기가 있는 행서로 쓰고, ‘완당(阮堂)’이란 낙관을 쓰고,10) ‘정희(正喜)’란 인장을 찍고 있다.

‘우선시상’에 관하여 “우선의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우선에게 상으로 준다.”라고 해석하는가 하면11) “우선 감상하게.”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으나12) 필자는 중의적으로 보고 싶다. 우선의 배려에 대한 보답이 되면 대가적 관계로 떨어져 <세한도> 제작의 의도가 빛을 바래고, 단지 우선을 위해서만 그렸다면 그림의 주인공은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그림의 주인공은 추사와 우선 2인으로 추사와 우선의 정신적 공감대도 그린 것이기에 “보답으로 보내니 감상해보게.”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세한도 화면에 4그루의 송백이 서있는데 좌측에 연륜이 적은 2그루의 송백이 종으로 서있고, 중간에 둥근 창이 난 사각형 집이 있고, 우측에 노송 1그루와 장년의 송백 1그루가 횡으로 서있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구도는 최근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 중 단원 김홍도가 1805년 그린 <추성부도>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우측의 노송은 추사 자신이고, 장년의 송백은 우선이 아니겠는가? 이 문장을 쓰고 난 후 강관식이 필자와 동일하게 본 글을 읽고 지음자를 만난 기쁨을 잠시 누렸다.13)

또한 서로 붙어 의지하거나 교감하는 관계로 보이지 않는가? 장년 송백을 집 가까이에 배치하고 노송이 장년 송백 쪽으로 비스듬히 기우러져 있어 추사가 우선을 품안에 안기도 하고 더욱 아끼는 느낌도 준다. 반면 우측 송백이 좌측으로 기울어진 노송을 받쳐주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14) 노송의 몸통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오른쪽 옆으로 가지를 내어 아래로 늘어져 끝머리에 잎새를 달고 있고, 왼쪽의 갈래는 야위어 위로 뻗어 화면을 벗어났다. 노송의 몸통에 거친 껍질과 아래쪽에 난 큰 구멍이 고난과 시련의 역사를 보여준다. <세한도> 제작에 앞선 1842년 부인 예산 이씨가 사망하였다는 부고를 듣고 얼마나 상심하였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쪽의 야윈 갈래가 화면을 벗어난 것은 현세를 달관하여 초월한 느낌을 주고, 오른쪽 갈래의 늘어진 가지 끝에 그나마 생기있는 잎새는 한을 극복한 대긍정이 아니겠는가? 반면 끝에 붙어있는 솔잎이 애처롭다.15) 말라죽을 것 같은 위태로운 형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16) 튼실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17)

좌측의 장년 송백은 밑동이 튼실하고 몸통은 일직선으로 위로 뻗고 좌우에 가지와 잎새를 교차로 드리우고 있다. 중앙의 집 좌측에 배치된 연륜이 어린 송백은 언덕이 서로 다른 곳에 서있는데 이것은 현실의 추사와 우선이 아니고 이상향 내지 정신적 공감대의 추사와 우선이 아니겠는가? 추사는 양반 계급 출신의 사대부이고, 우선은 중인 계급 출신의 역관으로 현실적인 신분차이를 넘어서서 정신적·이상적 세계에서는 또 다른 평등한 영원히 푸르름의 젊은 지식인의 기상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중앙에 있는 동토 위의 초가집의 사각형 구조 역시 당체는 사각형의 땅을 상징하고, 원형구조인 창 이른바 달창은 하늘을 상징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상징성을 띄고 있다.18) 추사의 몸은 비록 집에 갇혀 유배되어 있지만 추사의 정신만은 달창을 통하여 우주로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 난 창은 1/3쯤 닫혀있고 집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추사를 정치적으로 유배시킬 수 있지만 그의 정신을 구속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추사는 노송이 되어 물아일여(物我一如)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봉은사의 판전(板殿) 현판을 보면 원한을 잊고 어린아이로 돌아갔다는 느낌을 받는다.19) 더러는 외로움과 적막함의 극치를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20)

추사는 중국의 소동파(蘇東坡, 1037~1101)를 가장 좋아하였다. 소동파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의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에서 “빈 산에 사람 없네.”를 연상시킨다. 여기서는 공야무인 세한정적(空野無人 歲寒靜寂) “빈 들에 사람 없고 추운 겨울에 정적만 흐르네.”를 구현하고 있다. 오른쪽 여백은 눈 덮인 거친 들로 표현되고, 뒷배경은 윤곽이 없어서 제주 바다나 무한한 허공이 펼쳐져 아득한 느낌이다. 이 모든 대상은 현실의 실물이 아니고 추사 마음속의 상인 것이다.

기법은 간결한 구도로 황공망 계통 수지법(樹枝法)과 예찬(倪瓚)식의 <소림모옥도(疏林茅屋圖)>의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필묵법은 정통남종화의 핵심적인 묘법을 계승하여 황공망과 예찬계열의 피마준(披麻皴)과 적묵법(積墨法)을 매우 개성적으로 원용하고 있다.21) 갈필(渴筆)과 초묵(焦墨)만을 구사한 아주 조촐한 것이다.22) ‘갈필’이란 마른 붓에 먹물을 슬쩍 스친 듯이 묻혀서 그리는 동양화 묘법이고, ‘초묵’이란 마른 붓으로 여러 번 먹을 칠해 극도로 진한 먹물을 말한다. 초묵법은 그 비법이 끊어졌는데 추사는 우연히 30년 노력 끝에 제자 소치를 통하여 터득한 것이다.23)

추사는 고증학적 입장에서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철저한 이념미를 추구하였다. 그의 예술론은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로 요약된다. 높은 고양과 학식을 바탕으로 그림에서 절로 배어나오는 문기를 강조한 것이다.24) 이점을 이해해야 비로소 <세한도>의 진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추사는 <세한도>를 그린 취지를 문장으로 적고 이를 <세한도> 그림 좌측에 이어 붙였다. 마지막으로 4방의 인장이 찍혀있는데 오른쪽 상단의 완당 밑에 ‘정희(正喜)’, 오른쪽 하단에 ‘장무상망(長毋相忘)’, 중앙에 그림과 문장을 잇는 간인으로 ‘완당(阮堂)’, 왼쪽 하단의 문장을 마무리한 끝에 ‘추사(秋史)’ 인장을 찍었다. 붉은 인주로 찍어서 세한 속의 불씨로 그나마 따뜻한 온기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세한도>는 그림에 3장의 종이, 글씨에 1장의 종이를 잇대어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중국 고급지를 외면하고 거친 조선 종이를 잇대어 사용한 것 역시 추사의 궁핍함과 어려움을 대변하고,25) 그림과 글씨의 내용과 조화가 되고 있다.

이제 <세한도> 문장을 보기로 한다. 문장은 방안(方眼)인 자를 대고 네모칸을 만들어서 또박또박 1자씩 써내려갔다. 사각형 하나하나가 감옥인데 이곳에 고고한 정신으로 메꾸어 나갔다. 박철상이 번역한 원문을 옮기어 본다.26)

지난해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두 가지 책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하장령(賀長齡, 1758~1848)의 『경세문편』을 보내왔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 늘 있는 게 아니고 천만 리 먼 곳에서 구입해온 것들이다. 여러 해를 걸려 입수한 것으로 단번에 구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와 이권만을 좇는데, 그 책들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심력을 쏟았으면서도 권세가 있거나 이권이 생기는 사람에게 보내지 않고, 바다 밖의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보내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들이 권세나 이권을 좇는 것처럼 하였다.

태사공은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이런 풍조 속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권세나 이권의 테두리를 벗어나 권세나 이권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단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겨울이 되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공자께서는 특별히 겨울이 된 뒤의 상황을 들어 이야기 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니다. 겨울이 되자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아! 서한시대처럼 풍속이 순박한 시절에 살았던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권세에 따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다. 하비(下邳)사람 적공(翟公)이 문에 방문을 써서 붙인 일은 절박함의 극치라 할 것이다. 슬프구나! 완당노인이 쓴다.

이 글씨는 해서체로서 추사 특유의 필법으로 필획이 강하면서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27) 강건한 느낌을 준다. 글 내용의 서두에 <세한도> 제작의 배경을 언급한 뒤에 태사공 사마천을 언급하고 있다. 사마천이 억울한 궁형을 받고 『사기(史記)』를 완성하기 위하여 어려움을 견디었듯이 추사 자신을 사마천 심정에 오버랩하고 있는 것일까? 이어 공자의 『논어-자한편』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를 인용해서 세상인심과 우선 이상적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기-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오는 사마천의 평을 인용하고 있다. 급암(汲黯)은 한무제 때 중신으로 직언을 잘하고 절개가 뛰어났으며, 정당시(鄭當時)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청렴하여 모두 존경을 받았고, 적공(翟公)은 정위(오늘날 검찰총장 격)의 직에 있을 때 손님이 쇄도하였으나 벼슬이 떨어지자 집 대문에 새그물을 칠 지경으로 한산하였는데 다시 정위로 임명되자 또 다시 손님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문 앞에 “한 번 죽었다 한 번 살아남에 사귀는 정리를 알았고, 한 번 가난했다 한 번 부자 됨에 사귀는 세태를 보았으며, 한 번 귀해졌다 한 번 천해짐에 사귀는 인정이 드러났다.”라고 써 붙여 손님을 경계하고 만남을 거절하였다.28)

이제 전체적인 총평을 하자면 이 <세한도>는 치밀하게 계산된 재료, 구도와 풍광, 서체, 내용 등 오랫동안 연마한 추사가 학문적 공력과 서화의 평생 기량을 담아서 혼신의 힘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림은 황량함, 쓸쓸함, 고독감, 적막감, 가슴을 저미는 아픔, 사제지간의 정리(情理), 어려운 고난 속의 절개와 희망을 느낄 수 있고 글씨의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강관식은 <세한도>는 추사가 추구하고 있었던 그림의 본질적인 경계를 실현한 것이고 추사가 평생에 걸쳐서 지향하고 있었던 학예일치와 서화일치의 인문적 경계를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한다.29) 사족을 붙이자면 이 세상에 세한을 견디지 않고 성공한 사람은 없다. 황벽선사의 “박비향이란 게송에 한 번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고서 어찌 매화가 코끝을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不是一番 寒徹骨 爭得梅花 撲鼻香 불시일번 한철골 쟁득매화 박비향)”라고 하지 않았던가!

. <세한도>에 대한 찬사

우선은 이 그림을 받고 추사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0)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찌 이렇게 분에 넘친 칭찬을 하셨으며 감개가 절절하셨단 말입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권을 좇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에서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 것 없는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장보관을 쓴 것과 같아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절로 청량 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을 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제영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림을 구경한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물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권의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입니다.

우선은 1845년 북경에 연행사절단의 일원으로 가면서 이 <세한도>를 북경의 청조 19인 학자에게 보여주었다.31) 그중 17인이 감상문을 짓고 그중 16인의 감상문을 <세한도> 옆에 이어 덧붙였다. 이들의 비평이 <세한도>가 문인화의 최고봉이라고 국제적인 인가를 한 셈이다. 이 청유 16인의 글과 번역본은 국립중앙박물관이 2021년 세한전에 발간한 세한도록에 자세히 실려 있다.32) 그중 반희보(潘希甫, 1811~1858)의 글 일부를 옮겨본다.

예운림의 필의로 그린 한 폭의 그림이 만리 뱃길 따라 건너왔네.

겨울의 절조를 고사(高士)가 전하고 신령스런 물건은 태평세월을 알리네.

산골짜기에 있어도 재목은 버리기 어렵고 찬 서리를 맞아도 절개는 더욱 굳어지네.

선비의 지조를 기리어 현밖에 부치니 바다 건너 산속에서 진중하게 지내시라.

이어 한국인 김준학(金準學, 1859-1914)은 1914년 <세한도> 두루마리 앞쪽에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라고 큰 글씨를 쓰고 청나라 문인 풍계분의 시운에 따라 시를 덧붙여 <세한도>의 주인임을 명백히 하였고, 청나라 학자들 글의 사이에 1편, 마지막에 1편의 글을 덧붙이고 있다. 지금의 <세한도> 두루마리는 김준학의 2차 장황(裝潢)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33)

<세한도>를 손에 넣은 손재형이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정인보(鄭寅普, 1893~1950) 근대 한국인의 감상평을 받아 청나라 학자들의 글 뒤에 이어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독립선언서 33인의 한 분이자 근대 고서화의 최고 감식안을 가진 오세창은 “황천에 있는 친구를 일으켜 세워 악수하는 것 같아 기쁨과 슬픔이 한량없다.”라고, 상해 임시정부 법무총장이었고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이었던 이시영은 “내가 이 그림을 보니 수십년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맘고생한 선열들이 갑자기 생각나서 그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가렸다. 추사가 알았다면 자신의 감동을 버려두고 나의 감동에 감동했을 것이다.”라고, 대학자 정인보는 “손가는 대로 쓸쓸함을 그리니 쓸쓸하여 소리가 나는 듯 하지만 쓸쓸함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대의 변함없는 우정을 보인 것일세.”라고 적고 있다. <세한도>의 정인보의 제사 뒤에 여백은 미완이 아니라 이 땅의 이름없는 수많은 세한의 민초들의 말없는 제사가 아닐까?

. <세한도>에 얽힌 비사

<세한도>는 우선 사후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에게 넘어가 그의 아들 김준학이 상속받았다. 그 뒤 민영휘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의 아들 민규식이 상속받았다가 경매로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쓰카는 추사 연구가로 동경대학에서 「이조에 있어서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유명한 학자인데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세한도>를 가져갔다.

유명한 서예가이자 컬렉터인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1944년 일본으로 가 2달에 걸쳐 거의 매일같이 후지쓰카를 방문해서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하였고, 후지쓰카는 거절했으나 소전은 굴하지 않고 계속 찾아갔고 이에 후지쓰카가 감동하여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은 소전에게 있다고 하면서 넘겨주었다.34) 중국 철학교수인 후지쓰카는 추사를 무척 존경하고 <세한도>를 아꼈으나 감히 <세한도>에 발제문을 써넣지 못하였고, 소전은 근대 최고의 서예가로서 <세한도>를 손에 넣었으나 장황된 <세한도> 뒷부분(폭 33.5cm, 길이 1,469.5cm)에 상당한 여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글씨를 남기지 못하였다. 스스로 세한의 삶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겸양의 뜻으로 감히 자신의 감상평을 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전은 국회의원선거를 치르면서 선거 자금이 부족하여 <세한도>를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저당 잡혔으나 기한 내 돈을 갚지 못하자 <세한도>는 개성 인삼부자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다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서 영원한 안식처를 얻게 되었다. 이 <세한도>는 고난과 절개, 의리의 상징이므로 범부가 소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큰 선비가 가질 수 있을 뿐이고 사업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편안하게 쉴 곳은 대학이나 박물관이 될 수밖에 없다. 손창근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세한도>가 그 후손을 돌볼 것이다.

무릇 이러한 보물은 진정한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주인을 치게 되거나 주인이 놓아주어야 한다. 태평양전쟁으로 후지쓰카의 저택이 1945. 3. 10. 폭격으로 불탄 것을 감안하면 <세한도> 스스로 활로를 찾은 것이리라. 후지쓰카 지카시의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2006)는 2006년 부친이 수집한 추사 친필 20여점과 당대의 자료 2,700점을 과천시에 기증하면서 연구비 200만엔(한화 약 2,000만원)을 전달하였다. 한일 국민 간에 바람직한 관계정립을 위한 서광의 빛이 되어주었다.

. <세한도>와 관련된 작품

추사는 <세한도> 이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고사소요도>란 작품을 남겼는데 갈필로 송백, 바위, 인물을 능숙하게 그렸다.35) 우선은 <세한도>를 추사의 절친 권돈인(權敦仁, 1783~1859)에게 보여주었다. 권돈인은 <세한도>를 본 감흥을 윤필로 세한삼우(송·죽·매)를 그리고 뒤에 발문을 이어 붙여서 추사의 정신을 기렸다. 추사는 후에 이를 보고 “화의(畵意)가 이러해야 형사(形似)의 길을 벗어난 것이 된다. 이러한 의취는 옛날 유명한 화가들 중에도 터득한 자가 극히 적었다. 공의 시 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고 그림 서두에 <세한도>라고 쓰고 마지막에 화제를 적어주었다.36) 권돈인은 추사 사후에 복권시키는데 힘을 쓰고 추사의 제자 이한철(李漢喆, 1808~?)로 하여금 흑단령(관복)을 입은 추사의 전신 <김정희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화상찬을 썼다.37)

추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은 여러 차례 추사의 대정유배지를 방문하여 모시고 각종 심부름을 하면서 배움을 구하였다. 그는 추사의 <세한도>를 모방하여 <방완당산수도>를 그리고 또 추사의 <완당선생초상>,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을 남겼다.38) 추사의 어린 제자이자 요절한 천재화가 전기(田琦, 1825~1854)는 <계산포무도>, <매화초옥도>를 남겼다.39)

. <세한도>의 계승

추사의 <세한도>를 계승한 화가로 변시지(邊時志, 1926~2013)를 꼽고 싶다. 변시지는 제주 출신으로 일제치하에서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본인과의 결투에서 다리불구가 되었고, 광복 후에 귀국하여 서울에서 생활을 하였으나 일본풍이라는 비난과 중앙화단의 권력에 실망을 하고 제주 서귀포로 귀향하여 새로운 화풍으로 독자적인 지평을 열었다.

우리나라 황토색으로 제주의 폭풍, 바람, 돌담, 초가, 말, 송백 등 풍광과 인물의 고독감을 잘 묘사하고 있는바 <풍파>를 감상해보기 바란다.40) 서귀포에 그를 위하여 세워진 기당미술관이 있다.

[변시지, <풍파>, 1984, 캔버스에 유채, 161×129cm]

다음 추사의 세한 및 문인화 정신을 현대미술에서 단색화를 통하여 구현한 작가로 박서보(朴栖甫, 1931~현재)를 꼽고 싶다. 박서보의 작품 <묘법>은 한지를 이용하여 골(이랑)을 짓는 끊임없는 반복적인 작업을 통하여 선비의 수신방편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박서보는 “그림이라는 것은 내 수신(修身)의 도구입니다. 나는 그림을 통해서 수신을 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림이라는 것은 별거 아니고 내가 수신하고 남은 찌꺼기인거죠.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면서 하루 종일 염불하는 것과 같이 나는 수없이 반복해서 선과 선 사이의 골짜기인 그 골을 다스리는 겁니다.”라고 밝히고 있다.41) 예천에 박서보미술관이 세워질 예정이다.

박서보의 <묘법(Ecriture) No.161207>을 감상해보기 바란다.

[박서보, <묘법(Ecriture) No.161207>, 2016, 캔버스에 한지, 200×300cm]

이어 추사의 문인화풍을 일상의 삶에 구현한 화가로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을 들고 싶다. 장욱진은 서울대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시골에서 소박한 생활을 한 전업화가로 한마디로 말하면 심플(simple)한 사람이다. 그는 삶과 미술의 일치를 구현한 사람이다. 군더더기를 모두 버린 보통사람의 송백과 같은 삶을 현실에서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양주에 장욱진미술관이 있다.

장욱진의 <새>를 감상해보기 바란다.42)

[장욱진, <새>, 1987, 캔버스에 유채, 35.5×24.5cm]

마지막으로 소산(小山) 박대성(朴大成, 1945~현재)을 소개하고 싶다. 소산은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부터 왼손까지 잃고 독학으로 그림에 정진하여 현재 한국화의 최고봉에 오른 분이다. 경주 남산에 칩거하면서 시장에서 인기없는 한국화에 매진하여 왔다. 그 역시 삶과 예술의 일치를 이룩하였다. 경주 보문단지에 그의 기증작품을 가지고 문을 연 솔거미술관이 있다.

박대성의 <추정>을 감상해보기 바란다.43)

[박대성, <추정>, 2015, 수묵화, 75×56cm]

Ⅸ. <세한도> : 무가지보

<세한도>는 무가지보(無價之寶)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그렇더라도 만일 이 <세한도>를 경매에 붙이거나 세금을 매기려면 가격을 평가할 수밖에 없다. 2021. 4. 15. KBS 방송에 따르면 30여년 전에 10억원에 매도를 제안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경매사상 우리나라 미술품 중 최고 가격은 2019. 11. 23.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작품 <우주>가 홍콩달러 8,800만 달러(한화 약 131억 8,750만원)에 낙찰된바 있다. 중국의 근대화가 치바이스(薺白石, 1860~1957)의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가 2011 베이징 경매에서 중국 근현대 회화작품 중 역대 최고가인 4억 2,550만 위안(한화 약 714억원)에 낙찰된바 있고, <산수 12조 병풍>이 9억 3,150만 위안(한화 약 1,533억원)에 낙찰된바 있다.

[치바이스, <송백고립도>, 1946, 수묵화, 100×266cm]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에는 소나무에 독수리(또는 매)가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그림 오른쪽에 ‘인생장수(人生長壽)’, 그림 왼쪽에 천하태평(天下泰平)‘이란 대련 전서가 쓰여 있고, 그림 하단에 화제를 쓰고 낙관을 찍었다. 여기서 송백은 인생장수를 뜻하고, 독수리는 천하태평을 도모할 영웅을 상징한다. 이 그림은 치바이스가 전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蔣介石)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위 그림은 추사의 <세한도>와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현실에서 누구나 욕망하는 부귀와 장수를 다룬다. 마땅히 그림의 주인공은 권력자 1인으로 집약되는 것이다. 결국 장제스가 죽자 그림은 주인을 떠나 경매시장에 나와서 현대판 황제인 재벌에게 가는 것이다. 이 그림이 중국화의 최고 가격을 기록한 데에는 중국인의 현실적이고 현세지향적인 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세한도>는 정신의 승리이며 현세가 아닌 불멸의 역사를 지향하는 것이므로 <송백고립도>의 몇 배를 능가할 것이다. 필자는 최소 3,000억원 이상은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2021. 4. 19. 전야 탈고)

. 감상 참고방송 : 유튜브

1. 국립중앙박물관 <세한의 시간> https://youtu.be/y0uBoFLwgwI

2.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 속 세한> https://youtu.be/hkaHQaEN_I8

3. KBS 역사스페셜 <국보 180호, 세한도에 숨은 비밀> https://youtu.be/YIAMyviFb2Y

4. KBS 다큐 <세한> https://youtu.be/ShFq-e302ws

5. 국립중앙박물관 <유홍준-김정희의 삶과 예술1> https://youtu.be/iS1dQDPxTo8

6. 국립중앙박물관 <유홍준-김정희의 삶과 예술2> https://youtu.be/IlzHVJP5Qqg

7. 국립중앙박물관 <최완수-김정희와 세한도> https://youtu.be/Pt2isYPne7w

8. 국립중앙박물관 <박철상-김정희의 금석학> https://youtu.be/rr7eL2UPjIw

9. 국립중앙박물관 <박철상-학자 김정희와 세한도> https://youtu.be/xCdsbBGG5O8

10. 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강의 77 추사 김정희> https://youtu.be/gks1hF7cWuw

각주

  • 1) 유홍준, 『한국미술사강의3』, 눌와, 2013, p29
  • 2) 유홍준, 『한국미술사강의3』, 눌와, 2013, p18
  • 3) 유홍준, 『한국미술사강의3』, 눌와, 2013, p122 이파의 평론 참조
  • 4) 곽희, 『임천고치』, 신영주, 문자향, 2003, p15
  • 5) 유홍준, 『완당평전1』, 학고재, 2002, p57~100
  • 6) 유홍준, 『완당평전1』, 학고재, 2002, p126~130 진흥왕의 북한산비와 황초령비를 고증하였다.
  • 7) 유홍준, 『완당평전1』, 학고재, 2002, p337 초의선사와 교류, p384 백파선사와의 논쟁
  • 8)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41~66 피의자신문조서, p67~69 윤상도 상소문
  • 9) 유홍준, 『완당평전1』, 학고재, 2002,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추사의 일대기 참조
  • 10) 강관식,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p225 추사 그림의 법고창신의 묘경 참조
  • 11)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p285,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67
  • 12) 강관식,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p224, 고연희, 『그림 문학에 취하다』, 아트북스, 2011, p272
  • 13) 강관식,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p227
  • 14) 강관식,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p228
  • 15)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37
  • 16) 강관식,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p226
  • 17) 고연희, 『그림 문학에 취하다』, 아트북스, 2011, p273
  • 18) 대부분 사각형 창으로 묘사되나 조희룡의 <매화서옥도>(간송미술관 소장)에 원창이 보인다. 사각형 창의 전기의 <매화서옥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네이버검색, 유홍준, 『한국미술사강의3』, 눌와, 2013, p350, p357
  • 19) 김종헌, 『추사를 넘어』, 푸른역사, 2007, p150에서 졸(拙)이라고 평하고 있다.
  • 20)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45
  • 21) 강관식,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p228~229
  • 22)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29, 강관식,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p232
  • 23)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29
  • 24) 유홍준, 『한국미술사강의3』, 눌와, 2013, p337, 정옥자, 『우리선비』, 현암사, 2002, p317
  • 25)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34
  • 26)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65~166
  • 27)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p288
  • 28)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77~179
  • 29) 강관식,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개, 2002, p232
  • 30)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83~184
  • 31) 정후수, 『세한도 따라 조선에 온 해객금준제이도 제사』, 한성대학교 출판부, 2013, 19인에 대한 자세한 소개 참조, 그밖에 당시 한중지식인 간의 교류에 대하여는 정민, 『18세기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문학동네, 2014 참조
  • 32)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부록에도 번역문이 실려 있다.
  • 33) 박철상, 『세한도』, 문학동네, 2010, p195
  • 34)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p293~296
  • 35) 네이버, 추사, 고사소요도(간송미술관 소장)
  • 36) 네이버, 권돈인, 세한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p293
  • 37) 네이버, 이한철, 추사 김정희 초상
  • 38) 네이버, 허련, 완당선생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방완당산수도, 완당선생해천일립상(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 39) 네이버, 화가 전기, 매화초옥도, 전준엽, 『미술의 생각 인문의 마음』, 중앙위즈, 2013, p110
  • 40) 네이버, 기당미술관, 소장작품, 변시지, 서종택, 『변시지 폭풍의 화가』, 열화당, 2000 참조
  • 41) 네이버, 박서보, 한국현대미술의 살아있는 역사
  • 42) 가나재단, 『장욱진 백년 인사동라인에 서다(탄생100주년 기념전』 도록 참조
  • 43) 경주솔거미술관, 『묵향 반세기』, 황금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