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의 품격

[법률신문] 2014. 7. 10. 김백영

1. 사람이나 사물에는 품격이란 것이 있다. 그 사람이나 사물에 합당한 품위를 갖춘 격식을 말한다. 판결 역시 품격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판결이란 분쟁이 생긴 경우에 그 시비를 끝내도록 법원이 내리는 공권적 판단으로 그 무엇보다도 엄정한 품격이 요구된다.

판결문의 품격은 판결의 자족성과 완결성을 갖추어야 한다. 판결의 자족성은 판결의 결론에 대하여 납득할 만한 이유 설시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하고 판결의 완결성은 그 심급에 상응한 판단의 결론과 이유를 갖추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2. 우선 소액 사건을 보자. 대부분 이행권고결정을 받고 확정되나 이의 제기가 된 사건의 경우 판결문에 이유가 생략되어 있어서 판결문만 보아서는 사건의 실상이나 승패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피고의 이의제기가 있고 다투는 경우에는 판결이유를 설시하는 것이 품격을 갖추는 것이다. 소액사건심판법 제11조의2 제2항에 판결을 선고함에는 주문을 낭독하고 그 주문이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이유의 요지를 구술로 설명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으나 판결 선고일에 당사자가 출석하지 아니한 때에는 실없는 행위이다. 소액사건심판법 제11조2 제2항, 제3항에 “판결서에는 이유를 기재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되어 있을 뿐이므로 당사자가 다투는 사건에는 판결이유를 설시하는 것이 판결의 품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3. 다음 민사항소심사건의 판결문을 보면 1심판결의 일부를 인용하거나 일부 자구를 고치고 나머지는 그대로 인용하는 방식의 판결문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것은 항소심판결서에 관하여 민사소송법 제420조에 “판결 이유를 적을 때에는 제1심 판결을 인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므로 판결서 작성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둔 규정이다.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 별다른 주장과 입증이 없이 1심의 판단에 관하여 항소심의 재 판단을 받는 지극히 소수의 사건에 1심과 결론을 같이하는 경우에 제1심판결을 인용하는 때 이외에는 항소심에서 새롭게 조사한 증거에 관한 판단을 포함하여 새롭게 자족적이고도 완결적인 판결서를 작성하는 것이 항소심 판결의 품격에 어울린다. 왜냐하면 오늘날 전산화시스템 구비와 워드프로세서에서 불러오기, 붙이기 등 기계화 덕분으로 손쉽게 판결문을 작성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수기에 의한 판결서 작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규정을 오늘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특히 1심 판결문 몇 쪽의 ○○○을 △△△로 고치고 나머지는 그대로 인용한다는 형식의 누더기 판결문을 받고 소송 당사자나 소송대리인이 1심 판결문을 꺼내놓고 항소심 판결문에 의하여 1심 판결문을 연필로 임시로 고쳐서 읽는 사람의 불편을 생각해보면 판결의 품격은 고사하고 법원의 권위마저 추락시킨다고 볼 수밖에 없다.

4. 이어 민사상고심의 경우 단 몇 마디로 심리불속행으로 상고기각을 한다고 적은 대법원 판결을 받아보면 이 역시 최고 법원의 품격을 지닌 판결로 보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심리불속행 판결 이유에 대하여 많은 비판과 입법개선여론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대법원은 원심의 판결이 정당하여 상고기각을 할 사안이라면 원심판결의 이유를 인용한 후 기록에 비추어 보면 그 결론이 정당하다고 답하고, 선례위반이라고 주장하나 그 판례는 이 사건에 원용할 수 있는 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고, 선례가 없다고 하면 선례를 제시해주고 선례변경의 필요성이 없다고 하는 정도의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판결문 작성에 별다른 수고 요구되지 아니하고, 이러한 수고를 해줄 로클럭(재판연구원)도 있지 않은가.

5. 마지막으로 형사판결의 경우 형사소송법 제39조에 재판에는 이유를 명시하여야 한다고 되어있다. 피고인이 자백하는 사건을 제외하고 피고인이 다투는 사건에 유죄선고를 하는 판결서에 유죄의 이유를 쉬운 문장으로 납득되게 설명을 해주어야 비로소 판결의 품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유죄판결문에는 단순히 피고인의 일부진술, 증인의 일부진술이라고 돼있을 뿐이고 그 일부진술의 내용은 나와 있지도 않다. 거꾸로 무죄선고를 하는 때에는 검사에게 장황하게 무죄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형사재판에서 주된 당사자는 피고인이지 검사가 아니다. 현실에서 판결문 작성 관행이 이렇다보니 법관은 심리와 판결문작성의 부담으로 피고인이 부인하는 사안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오히려 유죄선고를 받는 피고인에게 자세한 유죄이유를 설시해야 하며 무죄선고를 하는 때에는 검사가 제출한 전 증거에 의하여도 합리적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간단히 이유 기재를 하면 될 것이다.

6. 이제 우리나라도 관료법학과 관료적인 재판에서 벗어나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법학과 재판이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재판제도를 운용하는 법관과 검사의 편의가 아니고 재판제도에 참여하는 국민의 편의 증진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그렇게 해야 비로소 세간에서 성의 없는 상소심 재판을 두고 기록 한번 들어서 놓는 것으로 판결한다는 비평을 면할 수 있고, 사법의 신뢰회복도 앞당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