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등록 서원 탐방기

[부산법조] 2020. 10. 18. 변호사 김백영

. 머리말: 건축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서원 중 9곳이 유네스코로부터 2019. 7. 6.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20년 여름휴가는 2차례(2020.7/25~7/29, 8/15~8/18)에 걸쳐 이 서원을 탐방하는 것으로 보내게 되었고 이에 따른 탐방답사기를 쓰게 되었다. 서원 탐방을 계기로 서원 건축과 문화에 관하여 숙고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흔히 건축이란 건축물을 짓는 행위를 말한다. 건축법에서 건축물이란 토지에 정착하는 공작물 중 지붕과 기둥 또는 벽이 있는 것과 이에 딸린 시설물, 지하나 고가의 공작물에 설치하는 사무소·공연장·점포·차고·창고 등을 말하고, 건축이란 건축물을 신축·증축·개축·재축하거나 건축물을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법령이 규제하거나 정의하는 건축이 아니고 예술적인 건축을 살펴보면 건축이란 단순히 공간을 창조하거나 배치하는 행위를 넘어 인류의 시대정신과 첨단기술을 담아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에 의하면 “건축은 노래를 읊어야 하며, 우리를 매혹시켜야 하며,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가 본 최근 건축 중에서 예를 들면 서울행정법원의 법정은 1층 아래 지하에 배치되어 있다. 행정법원은 국민이 국가기관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을 심판하는 법원인 만큼 주권자인 국민의 관점에서 재판하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발아래에 있는 공간에서 재판이 벌어지므로 재판관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베를린에 있는 통일된 독일의 연방의회 건축물이다. 이 건축물은 독일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오는 관광객들의 방문코스로도 유명하다. 옥상은 유리 돔으로 되어있는데 나선형 통로를 따라서 돔 정상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이곳에서 의회의 회의진행을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 회의장이 국민의 발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통제를 받는다는 그 상징성을 명백히 한 것이다.

서원이란 일찍이 중국에서 유학자가 제자들에게 유학이념을 교육하던 사립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다. 조선이 성리학을 국시로 채택하자 자연히 이를 공고히 하려는 데서 서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원은 성리학의 실천적 지식인인 뛰어난 선비를 기리고, 선비들의 교우 공간이자 그 이념을 펴기 위한 인재를 기르는 교육기관을 말한다. 서양에서 발생한 사립대학이 연상된다. 이하 유네스코에 등록된 서원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서원의 배치구조를 보면 불교의 사찰 배치구조를 본 따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찰 배치는 이른바 4동중정형(四棟中定形)인데 핵심 공간인 주불전(主佛殿) 앞마당을 기준으로 볼 때 앞에는 1주문부터 천왕문까지 도입 공간, 주불전 맞은편에는 루(樓), 측면으로 명부전·나한전의 부불전(副佛殿) 또는 동당·서당이 배치되고, 뒤쪽으로는 산신각·칠성각 등이 배치된다.

서원의 경우 우선 본당은 교수가 거처하는 폐쇄 공간과 강론하는 열린 공간으로 구분되고, 그 후면에 기리는 유학자의 사당이 배치되고, 그 전면에 유생들이 숙식하고 공부하는 동재·서재가 좌우로 배치되고, 정면 맞은편에 누각이 있거나 출입문이 배치된다. 평지의 경우 홍살문을 설치하여 신성한 장소임을 알린다.

. 유네스코 등록 서원

1. 소수서원(紹修書院)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고려 말에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安珦, 1243~1306)의 고향인 순흥(지금의 영주)에 1542년(중종 37) 사묘(祠廟)를 짓고 안향의 위패를 모셨다. ‘묘(廟)’란 왕이나 나라에 공을 세운 큰 인물의 묘나 사당에 사용한다. 다음해 사묘 동쪽에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였다.

그 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1550년(명종 5) 나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현판 글씨는 신광한이 짓고 명종이 직접 썼다. ‘소수’란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 기폐지학 소이수지)는 뜻을 담은 글자이다.

‘사액’은 임금이 내리는 서원의 현판으로서 사액서원이 되면 부수적으로 전답·노비도 내려져 공식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인증과 함께 재정적인 지원도 받게 되어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된다.

최초의 서원이다 보니 재정적 어려움으로 건축도 시간을 두고 차례로 확장됨에 따라 체계적이지 못한 구도와 배치를 띄게 되었다. 처음에 안향의 사묘가 건립되고, 그 옆에 강학당이 건립되고, 강학당 뒤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학구재(學求齋)·지락재(至樂齋), 교수의 숙소인 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가 건립되어 동학서묘(東學西廟) 양식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공간배치는 대부분의 서원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이나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의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서쪽(오른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의 전통 위차법(位次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른 것이다.[도판1]

외역에 성생단(省牲壇)과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강학당 내에 소수서원이란 현판이 있고, 전면 입구에 ‘백운동’이란 현판이 있다. 강학당의 교육이념이 바로 ‘소수’이다. 백운동은 주세붕이 성리학의 체계를 확립한 주자(朱子, 1130~1200)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따왔다.

성생단은 제사에 사용하는 희생제물이 병이 있는지 등 흠을 검사하던 곳이다. 무릇 조상에서 올리는 제물은 어떠한 흠이 있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고, 이것은 정성의 표식인 것이다.

경렴정은 시연(詩宴)을 베풀고, 호연지기를 기르던 곳으로 서원을 감싸 도는 죽계(竹溪)와 접하는 곳에 세웠다. ‘경렴’은 성리학의 개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경모하여 붙인 것이다.

출입문은 통상의 3문이 아닌 단문으로 되어 있고, 당호는 지도문(志道門)이다. 도에 뜻을 두는 것으로 한국 성리학은 도학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서원 입구의 소나무 숲이 일품이며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우뚝 서있다. 은행나무는 공자가 제자를 행단(杏亶)에서 가르친 고사에서 심었다. ‘행’은 중국에서는 살구나무이나 한국에서는 은행나무로 문화변용이 이루어진 것이다.

2. 남계서원(灆溪書院)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 7) 경남 함양 수동면에 세워져 함양출신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오래된 서원이다. 1566년(명종 21)에 ‘남계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남계’는 서원 근처에 흐르는 시내 이름이다.

연산군 시절 정여창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정여창은 연산군이 세자였을 때 스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은 성정으로 인하여 불화가 쌓여 악연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중종반정으로 복권되고,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동방오현(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 1인이 되었다.

‘일두’란 한 마리 좀벌레를 뜻하니 지극히 자신을 낮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인으로 존숭되었다. 인근 지곡면 개평마을에 일두 정여창 고택이 있다.

남계서원의 경우 성리학에 입각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데에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의한 삶을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선비를 서원에 배향하고 현창함으로써 이러한 길을 걸어가도록 격려하고, 위정자에 대한 경고의 뜻도 담겨있다고 본다.

남계서원은 경사지의 지형조건을 활용해 제향(사당 공간)·강학(본당과 동재·서재 공간), 교류·유식(遊食)(누각 공간)이라는 서원의 배치정형을 최초로 제시해 한국서원의 건축배치 형식의 근간을 마련했다.[도판2]

앞에 남강이 흐르고 뒤에 승안산을 두고 있는 배산임수 형국이다. 서원 앞에 홍살문을 세워 성스러운 곳임을 표식하고, 출입구 겸 2층의 누문 풍영루(風詠樓)에 들어서면 양옆으로 연당(蓮塘 연못)이 하나씩 꾸며져 있고, 정면에 본당인 명성당(明誠堂), 좌측에 보인재(輔仁齋)와 우측에 양정재(養正齋)가 있고, 본당의 후측에 별도 구획된 내삼문과 사묘를 배치하고 있다.

여기서 지성교육 공간인 강학당과 기숙사, 별도로 감성훈련 공간인 누각이나 정자를 세웠다는 것이다. ‘풍영’은 <논어>의 ‘선진(先進)’편 풍호무우(風乎舞雩) 영이귀(詠而歸)에서 따온 것이다.

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왈: 막춘자, 춘복기성 관자오육인, 동자육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

夫子喟然歎曰: 吾與點也

(부자위연탄왈: 오여점야)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에게 소원을 물었다. 이에 제자 중 한 사람인 증석(曾晳)이 말하길 “늦은 봄에 봄옷을 갖추어 입고 성인 5,6명과 동자 6,7명을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기우제를 올리는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를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감탄하며 말하길 “나도 점과 같이 하겠다.”

이것은 도학의 목표이기도 하다.

3. 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은 경주 안강읍 옥산리에 소재하고 있다. 옥산서원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을 배향하기 위하여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었고, 1574년(선조 7)에 ‘옥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회재는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사망했다. 회재는 행정과 학문을 두루 겸비하였다. 선조 1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선조 2년에 종묘에 배향되고, 광해군 2년에 문묘에 종사되어 지식권력의 국가공인을 얻었다.

자옥산 계곡의 산비탈에 건축을 한 배산임수 형국이고, 전학후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정문 입구는 3문 출입문으로 당호가 역락문(亦樂門)으로 <논어>의 ‘학이(學而)’편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에서 따왔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워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부하는 학동이건 유생이건 기쁜 마음으로 서원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오늘날 밋밋한 학교 교문에 비하면 얼마나 운치가 있는가!

정문을 들어서면 2층의 누각 무변루(無邊樓)가 나온다. ‘무변루‘ 편액은 한석봉이 썼다. 무변풍월(無邊風月)에서 따오고, 그 의미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靡欠靡餘 罔終罔始 光歟霽歟 遊于太虛 미흠미여 망종망시 광여제여 유우태허)”이다. 편액 좌측에 작은 글씨로 글귀가 새겨져 있다.

누각을 통과하면 정면에 강학당인 구인당(求仁堂)이 당당하게 들어온다. 바깥에 걸린 편액 ‘옥산서원’은 선조가 사액으로 내린 것이 불에 타 추사 김정희가 다시 썼고, 안쪽 편액 ‘옥산서원’은 선조가 처음에 내린 것으로 글씨는 이산해가 쓴 것을 다시 새긴 것이다.

구인당의 당호는 유교의 핵심가치인 인(仁)을 추구한다는 것과 회재가 저술한 구인록에서 따온 것으로 강학당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좌우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 민구재(敏求齋)와 서재 암수재(闇修齋)가 있다.

민구재는 나이가 든 유생이 기거하는 곳으로 ‘민구’는 논어의 호고민이구지자야(好古敏以求之者也 옛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구하여 아는 자이로다)에서 따와 인을 구하는데 민첩해야 한다는 뜻이고, 암수재는 젊은 유생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암수’는 주자의 암연자수(闇然自修)에서 따와 드러나지 않게 나날이 새롭게 스스로를 닦는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 느리기 마련이고, 젊으면 지나치게 활달하기 마련이므로 이를 경계하는 뜻이리라!

강학당의 후면에 회재 이언적 선생의 사당인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이는 인을 체득하였다는 존칭이리라!

체인묘 옆에 판각과 경각이 있다. 여기에 유교경전 등의 목판과 서책을 보관하는 것으로 오늘날 도서관 격이다. 옥산서원은 서원 중 최대의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 이것이 유네스코 등록 평가심사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사당 밖 담벽에 배롱나무 한그루가 꽃을 피우고 있다. 배롱나무는 붉은 꽃이 100일이나 가며 껍질은 스스로 벗는 것에 착안하여 선비는 충심을 나타나는 단심(丹心)과 스스로 날로 새로워지는 성장과 수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일신(日新)뜻이리라.

서원 앞에 흐르는 계곡에 세심대(洗心臺)가 있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며 오늘날 엘리트 교육과 비교해 볼 일이다. 이러한 교육과 자기성찰이 빠진 오늘날 세대에게 염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회재의 ‘이른 봄(早春)’이란 시를 소개한다.

春入雲林景物新(춘입운림경물신)

구름숲에 봄이 드니 경물도 새로워

澗邊桃杏摠精神(간변도행총정신)

시냇가의 복사꽃 살구꽃 정신을 잡아매네.

芒鞋竹杖從今始(망혜죽장종금시)

죽장에 짚신신고 봄놀이는 지금부터

臨水登山興更眞(임수등산흥갱진)

물 찾고 산 오르니 흥 더욱 참되네.

바로 인근에 회재 선생이 거처했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떨어진 양동 한옥마을에 회재 선생의 생가인 무첨당(無忝堂)이 있다.

4. 도산서원(陶山書院)

안동시 도산면에 소재하고 있다. 도산서원의 주향 인물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다. 퇴계는 성리학을 한국에 정착시키고 체계화 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을 통틀어서 국제적인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분은 퇴계라고 보고 싶다. 국제퇴계학회가 출범되었고, 중국의 양계초는 성학십도가 성리학의 요결이라고 평가했다. 퇴계는 동방오현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낙향하여 1561년(명종 16) 개설한 도산서당을 모태로 하여 사후 1574년(선조 7)에 문인과 유림이 세웠으며 1575년에 선조가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으로 사액을 내렸다.

도산을 배산으로 하고 낙동강을 임수로 한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국이다. 서원은 출입구 진도문(進道門)을 들어서면 전면에 강학당인 전교당(典敎堂)이 있고, 좌우에 동재 박약재(博約齋)와 서재 홍의재(弘毅齋)가 배치되어 있다. 전교당과 동재 후면에 사당인 내삼문으로 구획된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상덕사에는 퇴계 선생과 그의 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전형적인 제향 건물은 강항당과 일직선상에 배치되나 도산서원의 경우 강학당과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서원 건축의 혁신을 보여준 것인바[도판3] 이것은 사당이 수직적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강학당의 중요성과 위상을 강화하는 구도라고 읽혀진다. 서원의 양식이 보여주듯이 경전의 강학이 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의 정신을 그대로 드러낸다. 유식 공간이 없고 서원 밖에 도산서당·하고직사·농운정사·역락서재를 포괄하고 있다. 도산서원에 관한 자세한 소개는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 147~179쪽에 나와 있다.

퇴계 선생은 현재 1000원권 지폐의 전면에 초상화와 매화가 있고, 후면에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도산서당 이전의 계상서당을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를 볼 수 있다. 퇴계 초상화는 이유태가 그린 표준영정이다. 도산서원이 유네스코에 등록된 배경은 학문 및 학파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본 것이다.

도산서당의 정원에 매화가 가득하다. 임종계가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하고 좌탈하였다. 퇴계 선생은 매화 사랑이 유별나서 매화에 관한 시 91수를 묶어서 매화시첩을 내었다. 그 중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가 유명하다.

퇴계의 전인격을 엿볼 수 있는 사시유거호음(四時幽居好吟) 중 ‘봄(春)’을 소개한다.

春日幽居好 輪蹄廻絶門(춘일유거호 윤제회절문)

봄날 조용히 숨어사니 좋아라. 손님도 문을 드나든지 오래

園花露情性 庭草妙乾坤(원화로정성 정초묘건곤)

동산 꽃은 성정을 드러내고 뜨락 풀은 천지에 오묘하여라.

漠漠栖霞洞 迢迢傍水邨(막막서하동 초초방수촌)

아득히 노을이 깃든 동네에 멀리 시내가 돌아가는 마을이도다.

須知詠歸樂 不侍浴沂存(수지영귀락 부시욕기존)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즐거움을 알지니, 기수에서 씻어야 할 건 아니로세.

5. 필암서원(筆巖書院)

필암서원은 전남 장선군 황룡면 필암리에 소재하고 있다. 1590년(선조 23)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를 배향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하서는 성리학 이론을 도식화 하여 성리학 이해의 진전을 가져왔다고 평가받고 있고, 문묘에 배향된 18선정(先正) 중 1인이다. 하서는 인종이 세자시절 때 스승이었으나 인종이 즉위 후 9개월 만에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여 공부와 후학양성으로 생애를 마쳤다.

‘필암’이란 하서의 고향 맥동에 붓처럼 예리한 형상의 바위가 있어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1662년(현종 3)에 ‘필암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서원은 평지에 세워져있다. 그런 까닭에 홍살문이 먼저 나오고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있다. 서원 입구에 2층의 누각 확연루(廓然樓)가 있고, 1층은 3문으로 출입구로 사용된다. 편액의 ‘확연루’ 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글씨다. ‘확연’은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따왔다. 우암이 하서를 이 4글자로 평한 것이다. ‘확연대공’은 널리 모든 사물에 사사로운 마음이 없이 공평함을 의미하는 성인(聖人)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君子)의 학문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확연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강학당인 청절당(淸節堂)이 보이고, 왼쪽 쪽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재 진덕재(進德齋)와 서재 숭의재(崇義齋)가 있다. 서재 쪽 전면에는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청절당 정면에 사당인 내삼문과 우동사(祐東祠)가 위치하고 있다.

우동사는 ‘하늘(祐)의 도움으로 인하여 우리나라(東)에 태어난 분이 하서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통상 사당이 강학당을 뒤로 하고 있으나 이곳은 강학당과 사당이 마주보고 위치한 구조가 특색이다. 청절당은 우암이 쓴 하서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에서 따왔다. ‘청풍대절’은 맑은 바람 큰 절개를 뜻하니 하서의 인품에 걸맞은 것이다.

하서가 5세 때 지은 시 ‘정월 대보름 저녁(上元夕)’을 소개한다.

高低隨地勢(고저수지세)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에 따르고

早晩自天時(조만자천시)

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시간에서 비롯한다.

人言何足恤(인언하족휼)

남의 말 아랑곳 할게 없나니

明月本無私(명월본무사)

밝은 달은 본래부터 사심이 없어라.

5세 어린아이가 지었다는 것이 놀랍다. 이미 이 시에 하서의 성정과 앞날이 나와 있다.

6. 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은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뒤로는 대니산이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배산임수 형국이다. 도동서원은 지방유림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배향하기 위하여 1568년 비슬산 동쪽 기슭에 쌍계서원(雙溪書院)을 세웠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지금의 자리에 1605년 중건되어 1607년(선조 10) ‘도동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도동’이란 명칭은 공자의 도(道)가 조선(東)으로 옮겨왔다는 뜻이리라.

김굉필은 성리학을 토대로 교육을 통한 후학양성에 집중한 사림활동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고 한다. 김굉필은 소싯적에 건달기가 있었으나 18세 때 박씨 부인과 혼인함으로써 마음을 잡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공자의 제자 중 자로(子路)를 연상케 한다.

김굉필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주자와 제자 유자림이 편찬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이의 실천에 전력을 다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다. 도학공부의 실천규범이 소학에 있다고 본 것이다. 조선에서 가장 많이 발간된 서적이 바로 이 소학이다. 도학정치를 주도한 근본주의자 조광조가 전 백성을 상대로 보급하려 하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필화 사건인 무오사화 때 문인(門人)이라는 이유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정암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다. 중종반정 후에 조광조의 노력으로 복권되어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배향되었고, 동방오현 중 1인이 되었다.

김굉필의 ‘노방송(路傍松)’이란 시를 소개해둔다.

一老蒼髥任路塵(일노창염임로진)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歲寒迎送往來賓(세한영송왕래빈)

괴로워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세한여여동심사)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경과인중견기인)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겠는가.

도동서원은 비탈진 산기슭에 단계를 두어 입구에 2층의 누각 수월루(水月樓)를 세우고, 1층에 삼문을 두어 출입 및 유식 공간을 설치하였다. 다음 계단을 올라가 머리를 숙이고 환주문(喚主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학당인 중정당(中正堂)을 두고, 그 아래 좌우에 동재 거인재(居仁齋)와 서재 거의재(居義齋)를 배치하여 강학 공간을 조성하고, 마지막 최상단에는 내삼문을 두고 사당을 구획하여 제향 공간을 배치하고 있다. 중정당의 기단에는 여의주를 문 4마리 용두(龍頭)가 돌출되게 장식되어 있다.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등용이므로 합격기원의 뜻과 용은 물을 관장하는 존재이므로 화재에 대비한 풍수 인테리어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담장 옆에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3곳의 공간은 단차뿐만 아니라 담장으로 둘러 서로 구획하여 관계를 명백히 설정하고 있어 유교적 세계관에 따라 가장 규범적인 서원 건축양식을 띄고 있고, 담장은 강학당·사당과 함께 보물(제35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앞에 4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있다. 도동서원에 관하여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 205~232쪽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이 인(仁)이라면(거인재) 맹자의 가르침의 핵심은 의(議)이다(거의재). 이를 실행하는 데에는 중용의 묘라고 할 수 있다(중정당). 이것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내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즉 나의 주인공을 소환하는 것이다(환주문). 주인공을 찾는 공부가 도학인 것이다. 주인공을 찾는 데는 관점을 내면으로 돌려야 한다. 그러한 까닭에 환주문의 높이가 낮아서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고개를 숙이는 동작이 조고각하(照顧脚下)인 것이다.

유가에서 이러한 마음공부에 관한 서책으로 진덕수와 정민정이 지은 심경부주(心經附註)가 있다. 선종에서 서암화상이 매일 자기자신을 향하여 ‘주인공’이라고 부르고 ‘예’라고 대답하고, 이어 ‘깨어있는가’ 묻고 ‘예’라고 답하고, ‘언제 어디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예‘라고 답하였다.

7.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소재하고 있다. 지방유림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을 배향하기 위하여 1607년 사당 존덕사(尊德祠)를 지었다가 1610년(광해군 2) 서원으로 승격되고, 1863년(철종 14)에 ‘병산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서애는 임진왜란 때 군총사령관인 도체찰사로서 극난극복에 크게 기여한 정치가이자 군사행정가였다. 전란의 기록을 징비록으로 남겼다. 서애는 징비록 서문에서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고 밝히고 있다.

서원 앞으로는 백사장이 펼쳐지고 낙동강이 흐르며 강 건너에 병풍처럼 병산이 펼쳐져있고, 뒤로는 낮은 야산이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국이다. 출입구는 솟을대문인 복례문(復禮門)이 있다. ‘복례’는 <논어>의 ‘안연(顔’淵)’편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왔다.

顔淵問仁

(안연문인)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자왈: 극기복례위인.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위인유기, 이유인호재?)

顔淵曰: 請問其目

(안연왈: 청문기목)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자왈: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顏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안연왈: 회유불민, 청사사어의)

안연이 인에 대해 여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라도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천하가 모두 인으로 돌아간다. 인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다. 어찌 타인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조목을 여쭈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거라.”

안연이 말씀드리길 “제가 비록 어리석고 둔하지만 이 말씀을 공경히 따르겠습니다.”

‘극기복례’는 자신을 낮추고 예를 갖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도동서원의 환주문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유교는 법이 아닌 예로서 사회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예는 인의 실천조목이다. 오늘날 무한 욕망 충족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리더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요, 실천 강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광영지(光影池) 연못이 있다. 이어 계단을 올라가면 만대루(晩對樓) 누각이 있다. ‘만대’는 주자의 무이정사(武夷精舍) 내의 만대정(晩對亭)에서 따왔다. 두보(杜甫, 712 ~770)의 다음 시 백제성루(白帝城樓) 중 ‘취병의만대’가 그 연원이다.

江度寒山閣 城高絕塞樓(강도한산각 성고절새루)

강은 겨울 산 누각 옆을 지나고, 성은 높아 변방의 보루에 우뚝하다.

翠屏宜晚對 白谷會深遊(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

푸른 병풍 같은 산 늦도록 마주할만하고, 하얀 계곡은 모여 오래 놀기 좋아라.

急急能鳴雁 輕輕不下鷗(급급능명안 경경불하구)

급하게 울음 우는 기러기, 가볍게 내려오지 않는 갈매기.

彝陵春色起 漸擬放扁舟(이릉춘색기 점의방편주)

이릉에는 봄빛이 시작되니 차차 작은 배나 띄어볼까.

만대루는 누각이 7칸으로 길이가 다른 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도하게 긴데 여기서 밖으로 보이는 병산을 바라보면 7칸의 병풍으로 다가온다. 건축가 승효상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보면 자체는 별 볼일 없는데 병산의 풍경이 들어와서 그림이 완성이 되는 것”이라며 비움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했다. 즉 만대루는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둥만 남기고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병산을 그 속에 채울 수 있게 되어 있다.

만대루를 통과하면 정면에 강학당인 입교당(入敎堂)과 좌우에 동재 동직재(動直齋)와 서재 정허재(靜虛齋가) 있다. ‘입교’는 소학의 ‘입교(入敎)’편에서 따왔다. ‘입교’편은 자사(子思)가 지은 중용 1장 1절로 시작하고 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동직’과 ‘정허’는 주돈이의 통서(通書)에 나오는 정허동직(靜虛動直)에서 따온 것으로 ‘욕심이 없으면 고요할 때는 마음이 비워지고, 움직일 때는 마음이 곧아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입교당과 동재 사이를 돌아 들어가면 사당 존덕사가 나오는데 높은 계단 위에 사당으로 들어가는 평삼문(平三門) 형식으로 된 신문(神門)이 있다. ‘존덕’은 중용 27장의 구절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고, 묻고 배움을 길로 삼는다.’라는 의미의 존덕성이도문학(尊德性而道問學)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우러른다는 뜻이다.

존덕사 외부 공간에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존덕사 입구에 수백년 수령의 배롱나무가 무성하게 꽃을 피우고 서있다. 병산서원 만대루를 아름답게 그린 소산 박대성의 ‘청음(병산서원)’을 소개한다.[도판4]

8. 무성서원(武城書院)

무성서원은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위치하고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08?)을 주향으로 배향하기 위하여 지방유림이 세운 서원이다. 앞으로 칠보천이 흐르고 성황산을 등진 배산임수 형국이다. 1696년(숙종 22) ‘무성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조선 초기에 문묘에 모신 분은 설총, 최치원, 안향이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한 분으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떨치고, 당나라에서 관직생활을 한 국제적 감각을 갖춘 개방적인 인물이다.

무성서원은 1615년(광해군 7) 지역의 교육과 홍학(興學) 전통을 토대로 건립된 서원이며 서원이 가진 기능이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대표한다고 한다. 성리학의 사회전파와 관련해 사림활동 중 가장 대표되는 것은 지역 자치규약인 향약이다. 무성서원은 향약의 거점으로 기능하면서 지역민 결집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서원의 사회적 기능의 확대는 서원의 입지와 건축구성에도 영향을 끼쳐 무성서원의 건축물은 마을 안에 들어와 마을을 향해 열린 공간으로 구성되어 9개 등록 서원 중 예외적인 구조이다.

필자가 만난 서원 관리인에 따르면 이점이 오늘날 민주사회·대중사회·개방사회에 걸맞은 것이라고 하여 유네스코 등록 심사에서 후한 점수를 받아 비록 규모가 왜소하더라도 등록되었다.

‘무성’이란 <논어>의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자지무성 문현가지성(子之武城 聞絃假之聲)에서 따온 것이다.

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 莞爾而笑曰 割鷄 焉用牛刀

(자지무성 문현가지성 부자 완이이소왈 할계 언용우도)

子游對曰: 昔者 偃也聞諸夫子 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자유대왈: 석자 언야문제부자 왈 군자학도즉애인 소인학도즉이사야)

子曰: 二三子 偃之言 是也 前言 戱之耳

(자왈: 이삼자 언지언 시야 전언 희지이)

공자께서 무성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들으시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이때 읍재(邑宰)로 있던 자유(子游)가 대답했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 ‘군자가 도(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道)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자유의 말이 맞다.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

서원 앞에 홍살문을 세우고, 출입구는 2층 누각 겸 1층 삼문으로 이루어져있다. 누각 현판은 현가루(絃歌樓)이고 앞서 본 논어의 현가(絃歌)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읍시가 제작한 무성서원 팜플릿에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현가불철’은 <장자, 외편>의 ‘추수(秋水)’편 제4장에서 보인다.

孔子遊於匡, 宋人圍之數匝, 而絃歌不惙

(공자유어광, 송인위지수잡, 이현가불철)

공자께서 광(匡)이라는 고장으로 여행했을 때 송나라 사람들에게 겹겹으로 포위당하였다. 그래도 공자는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장자는 유가에서 외도로 보고 있는데다가 상황상 앞서 본 논어의 현가지성에서 따왔다고 보아야 함이 애민정신과도 상통된다.

현가루를 지나면 정면에 강학당인 강당이 있고, 마루 3칸이 앞뒤로 개방되어 뒤쪽의 사우(祠宇) 태산사(泰山祠)의 내삼문이 보인다. 동재 장수재(講修齋)와 서재 흥학재(興學齋)가 있다. 마당에 수백년 된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평지에 세워졌으며 강학 공간과 유식 공간이 같은 평면에 배치되고 사우만 1단 높이로 배치되어 삶과 죽음의 공간만 구분하였을 뿐이고, 삶의 공간에서는 백성의 공간과 차별을 두지 않고 애민정신에 입각한 융화를 보여주고 있다.

태산사는 최치원이 과거지명이 태산인 이곳에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지방유림이 이를 기리며 생사당(生祠堂)인 태산사를 세운데서 유래한다. 이러한 정신적 기조가 있었기에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를 구할 수 있었다. 무성서원의 선비 손흥록과 안의가 사재를 덜어 하인 30명과 수십 마리의 말을 동원하여 전주사고의 실록을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비래암으로 옮겨 숨겼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 6. 13. 면암 최익현, 둔헌 임병찬의 주도로 무성서원에서 호남 최초로 의병이 일어났다.

최지원은 신라 말 6두품 출신으로서 그 한계를 당나라에서 펼치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현실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이를 담은 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을 소개해둔다.

秋風唯苦音 世路少知音(추풍유고음 세로소지음)

가을바람에 이렇게 힘들여 읊고 있건만, 세상 어디에도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창외삼경우 등전만리심)

창밖엔 깊은 밤 비 내리는데, 등불 앞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

9. 돈암서원(遯巖書院)

돈암서원은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소재하고 있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과 지방유림에 의하여 1634년(인조 12)에 세워졌다. 1660년(현종 1)에 ‘돈암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사계는 송익필의 영향을 받아 잠깐씩 벼슬에 나아갔으나 연산에 은둔하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여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로 존숭받았다. 돈암서원은 성리학의 실천이론인 예학을 한국적으로 완성한 거점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사계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초상화를 감상하길 바란다.[도판5]

‘돈암’이란 명칭은 당초 세워진 서원 부근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서원 앞으로 연산천이 흐르고 뒤쪽에 고정산의 줄기가 이어지는 배산임수 형국이나 전체적으로 평지형이다.

서원 앞에 홍살문이 세워져있고 산앙루(山仰樓) 누각이 나온다. ‘산앙’이란 사람이 죽으면 산으로 돌아가니 산을 우러러 보는 것은 곧 조상을 우러러 본다는 뜻이리라.

솟을대문인 입덕문(入德門)을 지나면 마당에 300년 이상 된 향나무가 서있고, 전면에 강학당인 양성당(養性堂)과 좌우에 동재 거경재(居敬齋)와 서재 정의재(精義齋)가 배치되어 있다. 양성당 뒤쪽으로 내삼문이 있고 그 안에 사당인 숭례사(崇禮祠)가 있다. 사당 뜰에는 수백년 된 배롱나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숭례사를 구획하는 담장에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地負海涵(지부해함)

땅은 온갖 것들을 등에 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 주듯 포용하라.

博文約禮(박문약례)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瑞日和風(서일화풍)

상서로운 좋은 날씨와 온화한 바람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웃는 얼굴로 대하라.

입덕문을 시작으로 숭례사에는 사계 외에도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위 네 분은 문묘에 배향되어 있어서 돈암서원은 선정서원(先正書院)이기도 하다.

예학은 그 후에 벌어진 2차례에 걸친 대의명분을 둘러싼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거치면서 왕권과 신권, 집권을 위한 정치투쟁으로 변질되어 사화를 불러오는 부작용을 낳기까지 하였다. 이 예송논쟁을 주도한 인물이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이다.

. 의미있는 서원 2

1. 예림서원(禮林書院)

예림서원은 밀양시 부북면에 있다. 점필제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567년(명종 22)에 이도우가 창건한 덕성서원으로 출발하였으나 1635년(인조 13)에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예림서원으로 개칭하였고, 1669년(현종 10)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강학당과 동재·서재가 유림의 집회장소로 사용되다가 1971년 강학당을 중수하고, 1974년 묘우인 육덕사(育德祠)와 내삼문인 정양문(正養門)을 세웠다. 입구에 독서루가 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 양식이다.

김종직은 조선 도학의 종조로 받들여지고 있다. 기대승이 선조에게 보고한 우리나라의 도학 계보는 다음과 같다.

동방의 학문이 전해진 순서를 말하면,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시조이며, 길재는 정몽주에게 배웠으며, 김숙자는 길재에게 배웠으며, 김종직은 김숙자에게 배웠으며, 김굉필은 김종직에게 배웠으며, 조광조는 김굉필에게 배웠으니 본래 원류가 있다.

김종직은 27세 때 세조의 찬탈을 은유방식으로 비판한 조의제문을 지었고, 45세 때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란 시를 지었다. 이 2건의 글은 선비의 충분(忠憤)을 담은 것으로 사림(士林)의 공인을 받아 사림의 종조가 된 계기가 되었다. 결국 김종직은 연산군 때 발생한 무오사화로 인하여 부관참시되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복권이 되었다.

2. 덕천서원(德川書院)

덕천서원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있는데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고, 1609년(광해군 1)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1870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복원되었다.

앞에 덕천강이 흐르고 뒤에 구곡산을 두고 있는 배산임수 형국이다. 평지에 세워져 입구 앞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약 48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있다. 출입문은 솟을삼문의 형식으로 시정문(時靜門)이다. 시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학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좌우에 동재 진덕재(進德齎)와 서재 수업재(修業齎)가 있다. 후측에 사당인 내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서원 밖에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인근에 남명이 세운 서당 산천재(山天齋)가 있고, 2004년 남명기념관이 세워졌다.

남명은 퇴계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보다 2년 더 장수했다. 퇴계가 경상좌도의 영수이고, 남명은 경상우도의 영수이다. 남명은 평생 과거에 크게 뜻을 두지 않고 초야의 처사(處士)로 일관하였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1555년(명종 10) 명종과 수령청정 문정왕후의 국정수행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단성소(丹城疏)가 유명하다.

남명의 사상은 경(敬)과 의(義)라고 할 수 있다. 이 경과 의는 주역에 있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 경이직내 의이방외).”라고 한 것이 그 출전이다.

남명은 경의검(敬義劍)이란 칼을 차고 성성자(惺惺子)란 방울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경의검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의이다.)라고 새긴 것에서 결연한 의지와 실천력을 볼 수 있다.

이런 남명 문하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 등 수많은 의병장이 나온 점을 볼 때 살아있는 학문을 한 것이 증명된다. ‘남명’은 <장자, 내편>의 ‘소요유(逍遙遊)’편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남명은 유학의 테두리에만 머문 것이 아니고 학문의 범위를 노장(老莊)에까지 넓혔고, 이것이 굳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한 사상적 기반이었을지 알 수가 없다.

. 맺는말

유교의 선비는 유교의 성직자라고 할 수 있다. 불교로 따지자면 대처승이요, 개신교 목사에 해당된다. 유교는 현실과 현세중심·사람중심의 종교이다. 서원은 선비 중에 유교를 위하여 순교하거나 현창을 한 사람을 사당에 모셔 불멸의 존재로 모신다. 마치 서양의 많은 성당이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순교한 자의 이름을 따서 세워지듯이 서원을 짓고 사당에 모시는 것은 조선 500년이 성리학을 근간으로 세워지고 지탱되어간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 사원은 폐쇄 공간이 사당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방 공간인 강학당을 두어서 스스로 수양하고 끊임없이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능을 담당하였고, 이것이 더 주된 기능이었다. 이점에서 사립대학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또한 서원은 유교의 근검·절제·소박이라는 정신에 따라 흰색·회색·검정색을 위주로 한 소박한 건축장식을 하였다. 간혹 사묘의 건축물에 관하여는 단층을 하는 등 장엄하게 장식한 곳이 더러 보인다. 이점에서 사찰과 성당의 화려한 장식과 대비된다.

끝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을 계기로 유교정신의 긍정적인 기능을 되살펴 볼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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